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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 두산의 심장을 품고 엘지의 성지에 앉다

종로 <엘지포차>









야구는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1986년 봄, 아버지는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내 이름을 OB베어스 어린이회원 명부에 올려주셨다. 그 시작은 단순했다. 아버지가 박철순 선수와 같은 배명고 출신이었기에, 서울 팀 중에 OB베어스를 택했을 뿐. 만약 엘지의 전설이 나온 고등학교 동문이었다면?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그렇게 나는 ‘두산맨’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2019년 어느 날, 청계 5가 근처를 걷다가 낯선 포장마차 하나를 발견했다. 첫인상은 강렬했다. 내부는 엘지 트윈스의 역사와 숨결로 빼곡했다. 사진, 포스터, 응원도구—마치 한 팀의 심장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엘지팬이라면 환호성을 질렀을 곳. 하지만 나는 두산팬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멈췄다. 그날, 신분(?)을 감춘 채 같이 있던 친구를 설득해 2차 술자리를 그곳에서 이어갔다.

며칠 후, 나는 두산과 엘지의 경기가 있는 날을 골라 다시 그 포차를 찾았다. 첫 방문에서 이모님과 대화를 나누다 내 정체를 밝혔다. 이모님은 웃으며 받아들였지만, 남자 사장님은 아직 내 정체를 몰랐다. 그날 경기는 엘지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막판 두산의 역전극으로 끝났다. 내 가슴 속에서는 승리의 함성이 폭발했지만, 입 밖으로는 낼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난 후 포차 안은 찬 공기처럼 얼어붙었고, 술이 오른 남자 사장님은 들고 있던 엘지 깃발을 불태우려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조용히 떠나는 게 좋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코로나 시절이 지나고 몇 년 만에 다시 <엘지포차>를 찾았다. 간판 없던 시절의 거친 매력은 사라지고, 이제는 번듯한 간판과 함께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했다. 우승의 여운이 남아 있던 해였다. 엘지는 2년 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이곳은 순식간에 성지가 되어 있었다. 주류 회사들이 손을 대 세팅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날 것’ 같은 열기를 그리워했다.


사실 이 포차는 사장님 내외의 ‘야구 사랑’이 빚어낸 작품이다. 남편이 아내의 요리 솜씨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시작한 공간. 처음엔 토스트가 시그니처였고, 예약 손님에게는 삼겹살구이도 내주었다. 메뉴는 다양해졌지만, 토스트와 삼겹살은 여전히 주전 멤버다. 오랜만에 찾은 날, 이모님은 나를 ‘그 두산팬’이라며 반겨주셨다. 남자 사장님은 여전히 내 존재를 모르셨다. 경기가 있는 날 이곳은 예약 없이는 발을 디딜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 경기가 없는 날이라 한결 느긋했다. 이모님이 직접 담근 파김치를 내어주셨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기울였다.


두산 베어스 팬으로서 이곳은 늘 복합적인 감정을 품게 한다. 사방에 가득한 야구의 기운은 나를 설레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적진’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부럽기도 하고, 왜 여기 있는지 스스로 묻게도 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부정적인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야구가 주는 묘미다.


글을 쓰는 지금, 두산이 역전했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지가 선취점을 내서 중계를 꺼버렸었다. 다시 켜니 동점, 그리고 역전.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도 엘지포차에 갔어야 했다. 라이벌의 깃발이 펄럭이는 한가운데서, 승리의 순간을 속으로만 삼키는 그 짜릿함—그건 마치, 적진 속에서 들꽃처럼 피어나는 나만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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