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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금천 | 작아진 학교와 변하지 않은 맛

금천 시흥동 <동흥관>









내 학창시절의 배경이었던 동네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95년에야 비로소 ‘구로구’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이름을 얻었다. 그 시절, ‘금천’이라는 이름은 어딘지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미성년이었던 나는 행정구역이 바뀌어도 일상의 물결 속에 별다른 파문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흐르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그 변화는 어른들의 대화 속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문일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옆 건물인 문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같은 재단, 같은 이름, 그리고 걸어서 30초. 편리함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또 하나의 솔직한 이유는 다른 고등학교의 개명 때문이었다. 시흥고등학교가 ‘금천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 어린 나이에 우리는 성적이나 교육보다도 이름의 울림에 더 민감했다. 그 시절엔 명찰 속 글자가 곧 자존심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1호선을 타고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문득 생각났다. ‘한 번 가보자. 내가 자라난 그 동네로.’ 금천구는 1호선이 가로지르는 동네다. 전동차 창밖으로 스쳐 가는 역 이름들이, 오래된 사진첩 속 페이지처럼 나를 불러냈다.


다시 서 본 거리와 학교는 30년 전보다 훨씬 작았다. 거대한 성곽처럼 느껴졌던 교문은 소인국의 문처럼 아담했고, 끝이 없을 것 같던 운동장은 이제 거짓말을 보태 두세 걸음이면 가로지를 만큼 좁아 보였다. 주말이라 한산한 교정에 들어서니,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기억이 필름처럼 재생됐다. 점심시간마다 뛰어나와 농구를 하던 코트는 세련된 페인트를 두른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곳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나는 배가 고파졌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 즐겨 찾던 중국집으로 향했다.


대학 시절, 나는 동네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인연은 뜻밖이었다. 속이 쓰릴 때마다 찾던 단골 약국의 어르신이 어느 날 나를 불러 세우더니, 딸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누굴 가르칠 깜냥인가 자신이 충민하진 않았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학원엔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명, 훤칠하고 잘생긴 남학생이 있었다. 연예인처럼 주변의 시선을 모으던 그는 원장 선생님께 영어를 배우고 있었고,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부모님이 금천구청 근처에서 오래된 중국집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이름은 <동흥관>이다. 이제는 전국구로 이름난 중식당이지만, 시작은 한국 전쟁의 시기와 맞물려 있다. 1950~51년 무렵, 화교 1세대가 문을 열었다. 방이 17개, 280석 규모의 대형 식당이었으니 ‘관(館)’이라 불릴 만했다. 한때는 금천구 자영업자 중 가장 많은 세금을 내던 곳이었고,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이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동흥관 짜장면을 모를 수가 없다.


나는 대학 시절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이곳을 찾았다. 한입을 베어 무는 순간, 검은 소스 속에서 어린 날의 이야기들이 줄줄 끌어 올라왔다.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내 성장기에서 빠질 수 없는 보증수표다.


시간은 흐르지만, 어떤 장소는 우리 안에서 늘 현재형으로 살아있다. 금천구는 나에게 그런 곳이다. 변두리의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이제 내 인생의 중심에 놓인 시간의 골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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