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부산안면옥>
내가 처음 마주한 평양냉면은 ‘잿빛 강가’를 닮아 있었다. 담백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한 국물은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혀끝을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양념에 길들여진 다른 음식과 달리, 평양냉면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낡은 흑백사진 같았다. 먹고 난 뒤에도 입안은 고요했고, 오히려 공허함이 맴돌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눈부신 색채가 아닌 잿빛 그릇 안에서 펼쳐진 절제의 미학을.
그날은 대구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평양냉면에 도전하고 싶다던 그는, 오랜 세월 냉면을 즐겨온 나와 함께 첫발을 떼고 싶어 했다. 두려움도 호기심도 아닌, 묘한 미지의 표정과 말투가 나에게는 흥미로웠다. 누구나 그렇듯, 성공하기 좋은 집으로 알려진 <부산안면옥>을 택했다. 초보자들에게도 첫 경험의 문턱을 낮춰주는 곳이었다.
오후 4시, 혹시 모를 인파를 피하기 위해 일찍 만나기로 했다. 내가 먼저 도착해 낯선 출입문 앞을 서성였다. 흰 바탕에 파란 글씨로 적힌 간판은 묘한 이질감을 풍겼다. ‘왜 대구에서 부산일까?’ 그 이유는 오래된 역사 속에 있었다. 1905년 평양에서 문을 연 원조 안면옥,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서 이어진 명맥. 1969년 대구로 내려온 뒤에도, 부산 시절의 정체성을 잇기 위해 그 이름을 그대로 지켜왔다는 이야기였다.
한여름이라 밖은 용광로였다. 문이 열려 있어서 먼저 홀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가장 먼저 내 앞에 놓인 것은 따끈한 온육수였다. 주전자째 내어오는 이 국물은 찬 면발을 묶어주는 매듭이자, ‘선주후면’이라는 오래된 예법을 현재까지 되살려 놓았다. 사골과 잡뼈를 달여 내고, 간장과 무, 생강, 파뿌리, 마늘로 결을 다진 국물은 때로 인삼 향까지 스며들어 속을 달래줬다. 예법에 맞게 자연스레 소주 한 병을 불러냈다. 어차피 동료를 기다려야 했으니, 그 시간은 술이 메워야 했다.
벽에는 차림표가 걸려 있었다. 간판의 색과 톤앤메너를 잘 지켰다. 메뉴를 살펴봤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동시에 내는 것이 특이했다, 제육·수육·쟁반은 종이에 따로 적혀 붙어 있었다. 두산 팬인 나는 그 세 가지 메뉴의 특정 글자인 ‘제-수-반’을 ‘정수빈’으로 읽으며 혼잣말 같은 농담을 지어냈다. 억지였지만, 스포츠 팬이란 본디 그런 법이다.
잠시 후 친구가 도착했다. 혼자 소주를 기울이던 내 모습에 놀라더니, 곧 원래 그런 사람이라 여겼는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차림표 앞에서 익숙한 선택을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결단을 내렸다. 평양냉면 두 그릇.
곧 잿빛 그릇이 우리 앞에 놓였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대접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제발 이 맛이 그의 입맛에 맞길 바랐다. 면은 술술 씹혔고, 쇠고기의 결이 살아 있는 국물은 대중적인 취향을 포용하고 있었다. 호불호가 갈리기보다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맛. 친구는 몇 젓가락을 뜨자마자 의심을 내려놓았다.
그릇 위에는 편육과 배, 오이, 무가 정갈히 올려 있었고, 특이하게 동그란 고기완자 하나가 국물 위에 떠 있었다. 소리를 지를 만한 맛은 아니어도,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맛이다. 이 집의 평양냉면은 혀끝이 아니라 추억 속에서 감칠맛을 길게 남겼다.
서로 부담 없이 그릇이 비워지고, 소주잔을 부딪히는 횟수만 늘어갔다. 그때 벽에 걸린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투수, 김병현 선수의 사인이었다. 괜히 그와 동기화된 기분이 들어 잔을 높이 들었다. 그 옆에는 ‘문제의 사인’이 보였다. 대구가 낳은 국민타자, 두산의 전 감독 이승엽의 사인이었다. 애증이 얽힌 이름 앞에서 술은 더욱 빨리 비워졌다. 슴슴했던 평양냉면의 맛에도 그 순간은 묘한 매운맛이 배어들었다. 잿빛의 고요함 속에, 스포츠와 기억이 더해져 화끈한 여운이 남았다.
평양냉면은 결코 한 번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눈부신 색채의 음식이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잿빛 속에서, 오래도록 스며드는 맛으로 다가온다. 마치 강가의 흐름처럼, 흑백사진처럼. 친구의 첫 평양냉면 역시 그렇게 잿빛의 강가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에게도 오늘의 맛이 기억 속에서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