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삼씨오화><박연식당>
촬영장에 나는 약속보다 20분쯤 앞서 도착했다. 우리 양조장 제품 영상을 찍게 공간을 빌려달라고 삼씨오화 대표한테 부탁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줬다. 무상으로 빌린 자리일수록 마음은 더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촬영 전에 가게의 표정부터 기록해두기로 했다. 테이블의 위치, 쌓여 있는 조리 도구 등—오늘 하루가 지나도 ‘여기가 여기였음’을 증명해줄 증거 사진들 말이다.
문제는 날씨였다. 한강에서 밀려온 바람이 열린 출입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느닷없는 한파가 거리의 표정을 바꾸고, 사람들의 어깨를 한 치씩 끌어올렸다. 꼭 특정한 날이 되면 날씨가 요란해지는 순간이 있다. 하늘이 괜히 일에 끼어드는 것처럼. 나는 속으로 빌었다. 오늘은 별일 없이, 이 공간이 빌려준 호의만큼 무사히 지나가기를.
잠시 후 촬영팀이 주점 앞에 도착했다. 나는 카메라 한 대와 간단한 조명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촬영 차량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작은 세계가 접혀 들어 있었다. 장비들이 줄줄이 나오고, 사람들도 물결처럼 쏟아졌다. 배우, 촬영팀, 조명팀, 분장팀—스탠딩 에그 관계자들뿐 아니라 여러 스태프들이 각자의 손에 각자의 무게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내 몸도 자동으로 바빠졌다. 일련의 움직임들이 부딪힘 없이 흘러가게 만드는 작은 완충재가 되기로 했다. 동선이 막히지 않게 의자를 살짝 옮기고, 장비가 지나갈 틈을 열고, 부탁이 떨어지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촬영 스케줄이 밀리지 않도록 눈과 귀를 곤두세웠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들어오자, 나는 내가 서 있을 ‘사각지대’도 찾았다. 화면 밖에 있으되, 필요할 때는 언제든 화면 안으로 달려들 수 있는 자리. 존재감 없이 유령처럼 있다가도, 오더가 떨어지면 이 공간의 주인처럼 신속히 움직이는 것. 그게 내가 이 촬영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예의 있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배우가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 감독님은 곧장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화면이란 늘 ‘현실’을 담는 척하지만, 사실은 현실을 가장 그럴듯하게 고르는 작업이다. 스태프들이 최적의 화면을 찾기 위해 대화하고 눈빛을 교환했다. 배우들은 촬영 전 대사의 합을 맞추고, 분장팀은 씬의 온도에 맞게 얼굴의 색을 조율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같은 가게인데도, 조명이 한 번 바뀌면 다른 현실이 되고, 카메라가 각도를 달리하면 다른 기억이 됐다.
한 개의 씬이 끝나고 다음 씬이 시작되기 전, 모든 구성원이 다른 조합으로 재배치됐다. 신기했던 건 그 과정이 놀랄 만큼 매끄러웠다는 점이다. 좁은 공간인데도,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비껴가며 신속하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케이블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조명을 들고, 누군가는 대사를 다시 되뇌고, 누군가는 다음 컷을 위해 소품의 위치를 손끝으로 조정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나는 문득 축구 경기를 떠올렸다. 공 하나를 중심으로 선수들이 끊임없이 포지션을 바꾸고, 누구 하나가 과하게 튀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수행할 때, 팀이라는 생물이 가장 아름답게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촬영장도 그랬다. 카메라를 공처럼 중심에 두고, 모두가 순간순간의 패스를 주고받는 경기처럼 말이다.
그날 나는 촬영장에서 아주 오래된 사실을 새로 배웠다. 조직이라는 건 거대한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작은 배려들의 연쇄라는 것. 시스템이 원활하게 굴러가려면 뛰어난 누군가의 번뜩임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의 발이 엉키지 않게 한 걸음 물러나는 마음, 누군가의 일이 늦어지지 않게 미리 옆에 서는 준비, 화면 밖에서 소리를 삼키는 인내—그런 것들이 모여 장면이 된다. 나는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 장면들을 내 나름대로의 프레임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