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구름아양조
세월은 늘 같은 속도로 흐른다고들 말한다. 시계는 공평하고, 달력은 성실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의 체감은 그 공평함을 배반한다. 스무 살의 한 해는 길고, 마흔의 한 계절은 짧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떤 날은 자박자박 걸어오고, 어떤 날은 뛰어오듯 사라진다. 결국 빠른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나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되짚어보면, 내 20대는 대체로 수동의 시절이었다. 삶은 ‘주어진 것’을 수행하는 일에 가까웠고, 나는 그 수행에 충실하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누군가가 짜놓은 레일 위를 큰 의심 없이 달리던 시절. 그때의 나는 시간을 ‘사용’하기보다 ‘통과’했다. 멍하니 흘려보낸 모먼트가 많았고, 그래서 체감되는 시간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 흐름의 한복판에는 30개월의 공군 복무가 있었다. 국가에 시간을 바친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의 조각 한 덩이를 봉인해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 시절의 시간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명령과 규율 속에서 하루는 반복되었고, 반복은 때로 고요한 둑이 되어 흘러가는 시간을 더디게 만들었다. 시간은 내 손목에 찬 시계가 아니라, 부대의 종소리와 점호의 구령으로 걸어 나왔다.
20대의 끝자락, 내게 스물아홉은 작은 변곡점으로 남았다. 본격적인 취업 도전의 시기였다. 대학원 석사 3차 학기를 마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휴학을 선택했다. 방향을 바꾸겠다는 결심은 늘 두려움과 함께 온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한 사람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나는 스터디를 꾸렸고,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다시 조립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원 시절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시간이, 잠시 멈추니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 오래 가뭄을 겪던 땅에 갑자기 비가 내려, 무엇부터 적셔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나는 그 ‘쏟아지는 시간’ 앞에서 잠시 어쩔 줄 몰랐고, 스터디 외의 빈틈으로 시선이 새어 나갔다. 그렇게 예전 취미였던 프로야구에 다시 눈을 돌렸다. 응원문화에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에 올인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도—그 찬란한 20대의 마무리를 또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후회는 대개 한 줄로 쓰이지 않는다. ‘그때 그러지 말 걸’과 ‘그때 그랬기에’가 동시에 존재한다. 어떤 선택은 성취를 덜어내는 대신 기억을 더해주고, 어떤 선택은 결과를 얻는 대신 장면을 잃게 한다. 나는 아마도 그 시절, 결과와 장면 사이에서 불완전하게 균형을 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내 20대의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40대 후반을 지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대한다. 매일 계획표를 세우고, 루틴을 지키며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살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은 나를 지나가게 두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시간을 붙잡아 내 편으로 끌어당긴다. 뒤에 흐를 시간을 ‘끌어 써서’ 앞당겨 쓰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짧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시간이 자꾸 ‘농축’된다. 같은 24시간이 예전보다 더 많은 장면을 담아버린다. 장면이 많아질수록, 하루는 더 빨리 끝나는 법이다.
돌아보면 ‘시간이 빨라졌다’는 말은 사실 ‘내가 달라졌다’는 고백이다. 20대의 나는 시간 앞에 순응했고, 40대의 나는 시간과 협상한다. 20대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지만 내 것이 아니었고, 40대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분명히 내 것이 되었다. 느린 강물에 몸을 맡기던 사람이, 이제는 노를 쥐고 방향을 정한다. 방향을 정하는 순간부터 물살은 빨라진다. 목표가 생긴 삶의 시간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항구를 향해 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