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 걷는 독서, 추구하는 맛

서귀포 <제주 북케이션 위크>








원래 제주에 오려던 목적은 <제주 북케이션 위크>였다. 더 정확히는, 아는 책방 사장님들이 이 행사에 지원했고 나는 그 곁에 덩달아 함께 즐기고 싶었다. 매년 ‘가 볼까’ 하는 마음만 저울질해 온 북페어였으니, 이번엔 마음이 먼저 출발선을 넘어섰다. 다만 여행의 시작은 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사무국에서 ‘참가가 어렵다’는 메일이 도착했고, 신청했던 책방들은 결국 모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사장님들이 힘 빠진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 줬지만, 나는 이미 항공권을 예매해 둔 터라 크게 동하지 않았다. 계획은 부분 수정되었고, 대신 나 홀로 북페어 일정에 맞춰 제주에 먼저 도착했다.


북페어를 관람한다는 건, 고요히 앉아 책장을 넘기던 독서의 리듬을 바깥으로 꺼내 사람들의 발걸음과 종이 냄새 사이에서 다시 연주해 보는 일이다. 밑줄은 책상 위에서만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스와 부스 사이를 건너는 걸음의 박자에 맞춰 공중에까지 이어진다. 나는 그 선을 따라가며 문장이라는 작은 불씨들을 주워 담는다. 한 권을 끝까지 완주하기보다, 취향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고 손이 먼저 뻗는 책을 슬쩍 열어 본다. 그러다 내 안의 결이 정확히 맞물리는 문장을 만나면 잠금장치가 풀리듯 은근한 환희가 번지고, 뜻밖의 페이지에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한 줄을 마주할 때면 우연이 건네는 선물처럼 가슴이 단단해진다. 북페어는 결국 책들이 진열된 시장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이 스치며 내 하루의 결을 바꾸는 곳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를 확실히 움직일 만한 이유 하나쯤은 필요했다. 참가 부스를 훑어보니, 내가 이 씬에서 오래 떨어져 있었던 탓인지 낯선 이름들이 많았다. 당진의 공출판사가 거의 유일하게 반가웠고, 몇몇 상호가 어렴풋이 눈에 걸렸다가 금세 흘러내렸다. 큰 흥미가 채 올라오지 않던 찰나, 북토크 프로그램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민영이가 최근 낸《로컬 오딧세이》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프로그램이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작게 불이 켜졌다. 제주에 가기 전, 완독하고 책을 백팩에 넣었다.


행사장은 서귀포의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한림에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서쪽 해안가를 따라 일주서로를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는 창밖의 바람과 종이의 촉감을 번갈아 만졌다. 풍경을 보고 책을 보고, 다시 풍경을 보는 사이 문장은 제주 바다처럼 조금씩 색을 바꿨다. 이 책이 말하는 ‘맛’은 혀끝의 쾌락만이 아니었다. 한 끼가 건너온 거리와 계절, 그 재료를 길러낸 바다와 땅의 숨결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감각이었다. 익숙함과 편리함이 식탁을 풍요롭게 만든 듯 보이지만, 동시에 지역의 고유한 음식 문화와 제철의 기억, 사라진 품종과 조리의 손길이 조용히 지워져 왔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오딧세이’는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면서도,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기 위해 로컬로 돌아가는 회귀의 여정이었다.


서귀포에서 점심을 먹고 택시로 컨벤션센터에 도착했다. 북토크 한 시간 전, 부스를 천천히 돌았다. 예상보다 많은 책들이 느닷없는 영감, 혹은 예전에 품었다가 잊어버린 영감을 깨웠다. 책은 클래식하지만 그 클래식함은 낡은 관습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 살아남은 문장들의 품격이다. 유행의 언어가 바뀌어도 고전적인 결은 느린 호흡으로 의심을 잠재우며 조용히 설득한다. 그래서 나는 화려한 새로움보다 묵직한 익숙함에 더 자주 기대게 된다.


민영이와는 오랜만의 조우였다. 잠깐 근황을 나누다, 이곳이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임을 떠올리고 나는 객석으로 돌아갔다. 북페어를 기획한 분의 소개로 북토크가 시작됐다. 강연자는 아워플래닛을 함께 운영하는 민영이와 김태윤 셰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나온 시간과 지키고 싶은 가치들을 두 시간 동안 풀어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오래된 고민—양조하는 사람으로서 재료의 중요성, 그리고 로컬을 담아야만 하는 당위성—을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한때 마르쉐 농부시장에서 토종쌀 등 좋은 식재료를 사 와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마음은 ‘새로움’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감각’에 가까웠다. 강연은 그 시절을 다시 소환했고, 나는 잊고 있던 질문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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