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 감귤의 그늘에서 피어난 맑은술

제주 서귀포 <제주곶밭>








한국전통주를 처음 알고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여행의 우선순위는 늘 ‘양조장’이었다. 국내든 국외든 그 원칙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일랜드에 머물던 시절, 노르웨이 항공권을 예매하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일도 양조장들을 찾아 메일을 보내는 일이었다. 공식 투어가 있든 없든, 작은 동네 양조장이든, 홈페이지가 존재하면 같은 문장을 ‘복붙’하며 방문을 부탁했었다. 그렇게 보내던 메시지들 사이로, 그림스타드의 ‘뇌그네 외(Nøgne Ø)’에서 허락 메일이 도착했었다.


그림스타드는 한국으로 치면 충북의 작은 도시쯤 되는 곳이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렸던 정류장에는 말레이시아 출신 여성 직원이 나를 맞이했었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탱크와 배관 사이를 걷고, 발효의 냄새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브루어리 투어를 마쳤을 때, 나는 양조장은 술만 만드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었다. 그때의 감각은 지금도 손에 꼽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의 나는 예전만큼 못하다. 그럼에도 여행을 준비할 때면 양조장 위치 정도는 습관처럼 즐겨찾기해 두고, 검색 과정에서 마음을 흔드는 곳이 나타나면 결국 그 길을 찾아간다. 예전엔 ‘양조장이면 무조건’이었지만.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단어는 좀 더 선명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그것은 ‘로컬’이었다. 양조장의 덕목 중 하나인 로컬과의 상생이 매력적으로 구현된 곳은 자연히 눈길을 끌었다. 결국 그것은 그 양조장만이 가진 스토리텔링이고, 탄탄한 지역의 재료를 자기 방식으로 아웃풋으로 바꾸는 태도였다. 양조사의 마음까지 훔치는 브랜딩과 마케팅을 가진 양조장이라면, 분명 그 마음을 알아보는 소비자들도 따라오리라 생각했었다.


서귀포에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던 양조장이 있었다. 일주서로를 따라가다 숲과 밭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지점에서, 나는 문장 하나를 마음에 들여놓았다. “숲이 익으면 술을 빚는다.” 그 문장을 품은 곳이 바로 <제주곶밭>이었다. ‘곶’이 제주어로 숲을 뜻한다. 이곳은 술을 목적지가 아니라 ‘계절을 옮기는 방법’으로 보여주는 양조장이어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제주곶밭>의 외관은 ‘양조장’이라기보다 제주의 바람과 햇살이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 건물처럼 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붉은 벽돌의 외관을 좋아했는데, 그 질감은 제주의 흙과 햇빛을 동시에 닮아 있었다. 문을 향해 다가갈수록 외관의 단정한 리듬이 주변 감귤밭과 하늘선에 조용히 맞물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재료가 감귤인 양조장답게 전체적인 색채가 화사했다. 그 색감에 맞춘 브랜딩은 러블리한 결을 가졌고, 그것은 의외로 솔직한 설득이기도 했다. 결국 소비자는 술의 맛만큼이나 보임새에 이끌려 손을 뻗게 되기 때문이다. 매니저가 나를 응대했었고, 보유 제품들을 차분히 시음시키며 양조 포인트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나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양조사임을 밝혔고, 그러자 안쪽에서 대표도 나와 양조인들 특유의 대화가 이어졌다. 질문과 답이 오가며, 술이 단지 결과물이 아니라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라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특히 눈길을 두었던 것은 ‘진(GIN) 증류 클래스’였다. 평소 진이라는 주종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다음에는 수강생으로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었다. 수업은 단지 체험이 아니라, 이 양조장이 가진 실험성과 지향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창이었다. ‘배운다’는 행위는 언제나 ‘다르게 마실 준비’를 뜻했고, 그 준비가 생기면 술은 더 이상 소비재가 아니라 경험의 언어가 되었다.


미리 찾아보았던 소개 문장들은, 현장에서 더 확실했다. <제주곶밭>은 파치(못난이 농산물)에 발효 기술을 더해 가치를 만들고, 철마다 나는 제주 농산물을 활용한 한국전통주로 제주에 대한 공감각적 식경험을 전하고자 한다. 지속가능은 이곳에서 구호가 아니라 작업 방식이 되었고, 지역성은 단순한 산지 표기가 아니라 ‘버려질 뻔한 것의 다음 생’을 설계하는 윤리가 되었다. 실험성 역시 새로움을 과시하는 방향이 아니라, 제주의 흔한 원물들이 상품성이라는 기준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에게 다시 무대를 열어주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느껴졌다. 전통은 ‘틀’이 아니라 ‘문법’이고, 그 문법 위에 감귤과 레몬, 한라봉과 산복숭아 같은 계절이 문장처럼 올라앉아 술이 되었던 셈이었다. 많이 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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