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뜬돌집><대전집>
내가 인천을 처음 밟았던 때는 두 번째 수능을 치른 뒤였다. 지금처럼 클릭 몇 번으로 끝나는 지원 방식이 아니라, 원서 접수를 위해 직접 대학을 찾아가야 하던 시절이었다. 각 대학의 전광판에 실시간 경쟁률이 뜨고, 가족과 친척들까지 흩어져 지원 예정 학교 주변에 포진하던 풍경이 당연하던 때였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으면서 다시 수능을 본 1999년, 나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혼자 인하대학교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그 길이 나의 첫 인천행이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오랫동안 한 장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대학 시절 인하대에 다니던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당구장 계산대 앞에서 주머니 속 동전을 꺼내 요금을 치르던 순간 말이다. 다른 지역보다 터무니없이 저렴한 당구장 이용료, 게다가 ‘다마수’까지 짜다는 농담 섞인 풍문 덕분에, 한동안 내게 인천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 두어 개의 에피소드로 환원된 이름이었다.
그런 인천을 다시 찾은 것은 한 편의 칼럼 때문이었다. 인천역을 기점으로 그 일대를 천천히 훑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몇 가지 실마리를 건진 뒤에는 특별한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다 신포국제시장에 닿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오래된 시장 하나를 무심히 통과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간판들은 서로 다른 시대의 글씨체를 이고 있었고, 좌판 위에 놓인 채소와 반찬, 건어물과 분식은 상품이라기보다 오랜 생활이 응고된 표본처럼 보였다. 신포국제시장이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라는 사실, 개항 전 ‘터진개’라 불리던 자리가 개항 뒤 ‘새로운 포구’라는 뜻의 신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바닥은 더 이상 장터의 바닥이 아니었다.
이번에 다시 찾은 신포국제시장은 취재가 아니라 ‘미식의 목적지’였다. 인천에 사는 연선이의 홈그라운드에, 마포 사람이 원정을 온 셈이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시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장은 더욱 선명한 현재를 내보였다. 신포닭강정 앞에는 여전히 긴 줄이었고, 쫄면집과 만두집, 순댓국집, 공갈빵 가게와 분식집은 저마다의 냄새와 온도로 좁은 통로를 빼곡히 채웠다. 시장은 도시의 식욕만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파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먹거리를 사러 오지만, 실은 저마다의 생활 감각과 지나간 시간을 확인하러 이곳을 찾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처럼.
연선이는 신포국제시장을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횟집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태도에서, 이 시장이 누군가에게는 지도 위의 명소가 아니라 가족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시장 안쪽의 좁은 길을 따라 <뜬돌집>으로 향했다. 제철회와 해산물, 직화구이를 계절의 리듬에 맞춰 내주는 이곳은, 이자카야의 형식을 닮았으되 시장통의 정서를 놓치지 않는 전통주점이었다. 바깥의 번다함에서 한 걸음 비켜난 자리라 그런지, 뜬돌집은 하루의 끝을 접어들고 온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작은 피난처 같았다. 접시에 오른 해산물은 계절을 입고 있었고, 술잔은 대화를 재촉하기보다 천천히 풀어놓게 만들었다. 주류의 윗줄부터 연선이와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2차 역시 연선이의 추천 속에서 골랐다. 내가 고른 곳은 신포국제시장 뒤편 골목의 <대전집>이었다. 시장의 환한 전면이 낮의 표정이라면, 이 집은 조금 늦은 시간의 그림자를 품은 얼굴 같았다. 50년 안팎의 세월을 견딘 노포, 스지탕으로 이름난 집, 메뉴는 스지탕과 두부전, 녹두빈대떡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우리는 셋 다 주문했다. 전산가옥을 개조한 듯 낡고 아늑한 내부, 많지 않은 테이블, 벽면과 선반에 무심히 놓인 술병들, 인천의 개항로 맥주를 시작으로 녹색병이 쌓였다. 연선이와는 언론이라는 공통의 화두가 있었기에, 말은 물길을 타듯 막힘없이 이어졌고 취기는 그 흐름을 따라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 곁에 스며들었다. 인천은 이제 더 이상 몇 개의 에피소드로 환원되는 도시가 아니었다. 오래된 시장의 저녁 속에서, 나는 비로소 인천이 살아온 시간의 맛을 조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