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선택부터 계획 하에 실행하는 나에게도,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즉흥적으로 여행이 시작될 때가 있다. 나는 원래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길 위에 서기 전, 이미 마음속에서 수없이 동선을 그어보고, 머무를 풍경과 스쳐갈 골목의 느낌까지 미리 상상해두어야 안심이 되는 쪽에 가깝다. 여행은 늘 설계와 예습의 산물이었고, 나는 그것을 하나의 성실함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철저한 준비의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한마디가 있다. 그 순간의 나는 계획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의 문 앞에 선 사람이 된다. 익숙한 통제의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는 일은 늘 조금 두렵지만, 그 두려움 속에는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감각이 함께 스민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시작된 여행은 목적지보다 먼저 내 마음의 무드를 바꾸어놓는다. 여행이란 내가 선택해서 떠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고요한 부분이 마침내 응답하고 싶어지는 방식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번 베트남 여행이 그랬다. 작년 여름, 승명이가 한국에 잠시 머물렀을 때였다. 그녀는 곧 호찌민에 상주하게 될 예정이었고, 반쯤 농담조로 내게 말했다. “내가 8월부터 먼저 가서 적응해놓고 있을 테니, 내년에 놀러 와.”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래 내 안에 남았다. 사실 나는 동남아 여행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특별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덥고 습한 기후는 내게 늘 망설임의 이유였다. 나는 추위보다 더위에 약한 사람이고, 특히 습기는 몸보다 기분을 먼저 지치게 하는 종류의 공기라고 여겨왔다. 2007년 6월, 방콕에서 겪었던 끈적한 더위 역시 그런 선입견을 오랫동안 강화해온 기억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기후보다 한마디에 더 쉽게 흔들린다. 동남아의 1월은 생각보다 건조하고, 기온도 한국의 초여름 정도라는 승명이의 설명은 내 안의 완고한 저지선을 조금씩 허물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만난 바로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찌민행 왕복 항공권을 결제했다. 오래 고민해 결정한 여행보다, 그렇게 문득 결제해버린 표 한 장이 더 선명하게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 이미 떠남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찌민은, 내게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동남아의 공기였다. 거의 20년 만이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실감한 것은 도시 자체보다 사람의 밀도였다. 승명이가 미리 말해준 대로 여행객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입국심사장 앞의 줄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체류 장면처럼 이어져 있었다. 한 도시의 첫인상은 언제나 공항에서 만들어진다.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몰라 잠시 멈칫하는 순간, 낯선 언어의 속도, 조급함과 체념이 섞인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위를 덮는 공기의 온도. 여행은 풍경보다 먼저 시스템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번 여행은 내가 전부 준비하던 과거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승명이의 조언이 나의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엄청난 입국심사 대기를 피하려면 패스트트랙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알려주었다. 실제로 공항에서는 군복을 입은 직원에게 현금을 건네고 좀 더 빠른 동선으로 이동하는 장면도 마주했다. 줄은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내가 서 있는 위치의 사진을 찍어 승명이에게 보냈다. 그녀는 답장했다. “한 30분이면 나올 것 같은데.” 놀랍게도 정말 그쯤 되어 입국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을 내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것이 언제였는지 잠시 떠올렸다. 2013년, 한밤중의 더블린 공항에서 유학원이 보내준 픽업 차량을 만났던 기억 이후로 처음이었다. 호찌민 입국장에 선 승명이는 생각보다 더 반가웠고, 나는 생각보다 쉽게 들떴다. 그것이 단지 영하 20도에 가까운 한국의 겨울에서 영상 25도 안팎의 공기로 건너온 몸의 놀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나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존재는, 기후보다 훨씬 빠르게 마음의 온도를 바꾸어놓는다.
그녀는 회사에서 고용한 기사분이 운전하는 차에 나를 태웠다. 그리고 내 손에 웰컴 드링크를 쥐어주었다. 비로소 내가 초대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누군가의 환대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여행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낯선 도시를 정복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가 건너가 있는 삶의 리듬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베트남 여행은 관광보다 먼저 환대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