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 | 누군가의 생활이 내 여행이 되는 순간










나는 매년 연말이면 어디론가 떠난다. 한 해의 끝에 길 위로 몸을 밀어 넣는 일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는 방식이면서 아직 닿지 않은 마음의 지도를 펼쳐보는 의식이기도 하다. 2023년의 끝자락, 나는 그동안 좀처럼 발길이 닿지 않았던 충청남도의 빈칸들을 메우듯 홍성에서 보령으로, 다시 청양을 방문했다. 1박 2일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행 버스를 타기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을 때, 청주에 사는 김우림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빠, 충청도에 있네? 청주도 함 들리지?” 이미 내 마음은 서울행이었다. 그러나 우림이는 한 번 더 밀어붙였다. “오빠, 지금 낮술 마시는데, 나 아는 동생도 내일 집에 간대. 오빠만 오면 돼.” 그 말은 약속의 매력을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 관계의 가장자리를 슬쩍 당겨 나를 안으로 넣는 방식에 가까웠다. 제3자의 존재가 개입하는 순간, 그 제안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에 응답하는 문제로 바뀌었다. 결국 나는 서울행 버스를 취소하고 청주행 버스에 올랐다.


그날 낮술 자리에는 우림이 가족과, 우림이와 같은 방송국에서 일했던 아나운서 후배 조혜선이 함께 있었다. 혜선이 역시 우림이의 권유로 청주에 하루 더 머물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림이 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새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지나간 유행가와 그 시절의 장면들이 번갈아 흘렀고, 몸은 술기운과 리듬에 떠밀리듯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어떤 인연은 대단한 계기보다도, 예정에 없던 우회와 한 번의 선회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날 알았다. 혜선이와의 인연도 그렇게 생겨났다.


혜선이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 호치민에서 주재원 생활을 한 지 5년차가 되었다. 청주에서도 우림이와 함께 호치민에 놀러오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약속은 우림이보다 내가 먼저 지키게 되었다. 이번 호치민 여행은 혼자 떠나는 일정이었지만, 동시에 현지에 살고 있는 지인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축이었다. 그래서 관광지의 우선순위보다 지인들의 시간이 먼저였다. 나는 호치민 공항에 도착해 입국 절차를 마치고, 막히는 도로를 겨우 빠져나와 숙소에 들렀다. 캐리어만 던져놓듯 내려놓고 혜선이가 말한 약속 장소로 거의 구보하듯 뛰어갔다.


혜선이는 오전에 딸 윤조를 학교에 보내고, 자기 일을 미루면서까지 나를 위한 시간을 내주었다. 밥을 먹으며 우리는 우림이에게 영상통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은 닿지 않았다. 대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혜선이의 생활 언어였다. 처음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내게 그녀는 이 도시의 선배였다. “처음엔 다 그래”라는 말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가이드북에는 잘 적히지 않는 생활의 문장들이 그녀의 말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계속 물었고, 혜선이는 오래전 자기 역시 이 도시를 더듬으며 배웠을 법한 것들을 차분하게 번역해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은 조심스러워진다. 젊은 시절에는 좋은 사람이니 서로 만나보라는 말이 가벼운 친절처럼 가능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과 기질과 피로의 방식을 단단히 갖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소개한다는 건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결이 부딪히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책임을 동반한다. 처음에는 승명이와 혜선이를 따로 만나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게 가장 무난하고 옳은 방식이라 여겼다. 그런데 승명이가 혜선이를 함께 만나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그 둘을 한자리에 불렀다. 다행히 예상대로 둘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타지에서 고향의 말씨와 정서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향수병을 다독이는 약이 된다. 우리는 셋이 함께 점심을 먹고 낮술을 마셨다. 그렇게 조금씩 긴장이 풀리던 자리에서 둘은 내게 연달아 말했다. 택시만 타지 말고 이제 오토바이 그랩도 한번 이용해보라고. 나는 끝까지 무섭다며 웃어넘겼지만, 혜선이는 말 대신 몸으로 답하듯 직접 오토바이를 불렀다. 헬멧을 쓰고 가볍게 올라탄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도시의 흐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감탄했다. 이미 배운 사람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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