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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조은 Nov 06. 2020

매일매일이 응급인 의료 스타트업에서 보내는 1년의 회고

원칙1. 가장 위태로운 당신이 첫 번째 진료 환자다


응급실 1원칙

추운 한겨울날, 옷 입을 힘도 없어서 잠옷에 롱패딩만 걸치고 혼자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어요. 너무 아파서 눈에 봬는 게 없었는데, 리셉션에서는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로 ‘대기실에서 몇 시간 기다리고 있으면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미운 말로 들렸지요.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성적인 맨 정신의 상태에서 응급실 규칙을(나무위키​​) 읽고 보니, 굉장히 수긍이 갑니다. 일반 병원과 다르게 응급실에서는 ‘누가 먼저 접수했냐’가 아니라 ‘누가 더 위중한가’의 기준이 응급 환자의 진료 순서가 됩니다. 그러니 제발로 응급실을 걸어들어올 기력 정도는 있는 저 같은 환자라면, 생사가 달린 더 위급한 환자에게 손길을 뻗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의사 출신의 강남언니 공동창업자 두 분으로부터 응급실 실습을 돌던 옛 시절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요. 하루에 의사가 진료할 수 있는 환자 수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의사는 계속 매달리고 질문하는 환자들에게 아주 매몰차게 응대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의료 환경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이들은 의사의 길이 아닌 의료 산업계로 뛰어든 창업가가 된 것이겠지요.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저에게 강남언니 회사에서의 일 년을 가장 떠오르게 한 단어가 바로 ‘응급실’이었습니다. 나름의 굳센 각오로 뛰어들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하루하루가 응급의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벌써 일 년’이 아닌 ‘몇 년 같은 일 년’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아마도 이 연유로는, 한국 의료 서비스 시장이야말로 다른 영역보다 상대적으로 기존 관행을 벗어나려는 의지와 유연한 신산업에 대한 조화가 꽤나 느리고 보수적인 잔상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떠오르는 예시가 원격진료겠지요.


강남언니와 같은 의료정보 플랫폼 또한 변화를 부정하는 기존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대안일텐데요. 가뜩이나 획기적인 변화가 느리고 전통이 깊은 시장인데, 이를 바꾸겠다고 나선 대안이니 한 걸음을 내딛기에도 힘겨운 싸움이고 맙니다. 사실 저에게 무관심과 무지의 영역이었던 이 곳은 예상보다도 더 소비자를 정보 깜깜이로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함을 깨달았고요. 요즘도 하루에 몇 건씩 의료 소비 피해를 다룬 기사를 접하다보니, 도저히 자생적인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개인에게 평생의 부작용과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에요. 수술실 CCTV 설치가 환자에게 좋은 것이냐, 의사에게 나쁜 것이냐를 논쟁하는 와중에도, 성형외과 수술실에 치과의사나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대리로 칼을 맡겨서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는 게 현실입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 시장 혁신의 범주에 정보 플랫폼이 속한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을 더욱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혁신이라고 해서 인공지능, 로보틱스와 같은 선행기술만 떠올리지 않고 말이에요. 30년 경력의 베테랑 의사도 하루에 천 명 진료 보는 건 불가하지만, 시스템의 플랫폼화는 하루 천만 명의 수용도 가능해지는 스케일러블 혁신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비스 이름이 강남언니가 뭐야’, ‘성형 시장은 너무 부정적이야’라는 피드백은 전혀 우리에게 대미지를 입히지 않습니다. 성형 시장이 부정적이고 위험하다면, 이는 오히려 정보를 정제하는 플랫폼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더 높이는 논리겠고요. 진짜로 페인 포인트라고 생각되는 문제는 매일 코드블루의 위급한 상황에서 치료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바위에 계란치기 식의 현타도 느낍니다. 그렇기에 미세한 스크래치 정도의 영향력마저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문제를 지나간 과거로 만드는 일

그런데 이걸 다 함께 바꾸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 즉 동료들을 보면 놀랄 때가 많아요. 의사를 설득해서 병원의 시술 가격을 앱에 등록하게 하고, 의사와 유저가 모바일로 소통하게 하고, (마치 야놀자가 모텔 산업을 양지화했듯) 대놓고 ‘언니없이 하지마’라고 선전포고까지 합니다. 시장을 바꾸려는 고민은 우리가 할테니 ‘소비자들의 고민은 이 곳에서 끝날 수 있도록’ 돕겠다, 즉 더 이상 사회구조적 폐해가 소비자에게의 피해로 연결되지 않았으면 하는 궁극적인 사명감일텝니다. 이제 갓 성형과 시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10대 후반 세대들은, 부디 ‘강남언니’, ‘강남미인’이 사회풍자적인 용어였던 이유를 당최 모르고, 불법 브로커와 소비자 깜깜이 시절을 옛 지나간 역사로나마 알 수 있게끔 변화해야겠지요. 우리 엄마한테 우리가 시장을 바꾸겠다고 설득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몇 년 뒤에 성형 수술을 결심할 가능성이 더 높은 Z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이 곳에서 저의 역할은 홍보나 기업 브랜딩 담당도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조금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얹도록 혼신을 다하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결국 조직의 모든 역할은 기능의 합도 아니요, 다 동일한 정체성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1년 회고의 결론이 ‘이 시장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지만, 걱정과 체념보다는 앞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챌린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점이 불행 중 큰 다행입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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