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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조은 Dec 22. 2020

코로나를 잠시 벗어나, 제주도 재택근무기


코로나 걱정만 하다가,

이렇게 일 년이 지나간다. 확진 상황에 따라 자율 재택을 권고하던 회사도 11월부터 또 다시 기본 근무를 재택 체제로 바꾸었다. 지난 2월 코로나 비상사태로 난생 첫 재택근무를 돌입해 우왕좌왕하던 회사의 모습은, 어느덧 재택근무 문화를 성숙하게 정착시키고 있다. 글을 쓰는 현재 12월 22일은 전국 확진자가 1천명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니, 집 앞 편의점을 갈 때도 중무장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창밖을 보며 "오늘 날씨 좋다" "와! 눈 온다"를 외쳐봤자 아침부터 밤까지 노트북을 두들기는 일상이 전부이지, 몇 백 걸음도 채 걷지 않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로 간 배경

제주에서의 재택근무는 지난 9월 일주일 간의 이야기다. 벌써 조금은 까마득하다. 당시 상황은 전국적인 코로나 확산이 줄어들었다가, 8월 중순 서울을 중심으로 코로나 2차 대확산이 시작된 때였다. 회사가 두 번째 집중 재택근무 기간에 돌입하면서, 나에게도 코로나 블루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숨통 돌릴 줄 알았는데 또 다시 세상이 봉쇄되다니. 업무 특성 상 일주일에도 몇 명은 회사 밖의 사람을 만나고 행사장에 참석하던 생활은 올해 도저히 불가능했다. 모든 연례 컨퍼런스가 취소됐고, 동료와 외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삭혀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9월 초 일주일 간은 서울을 벗어나 제주 에어비앤비에서 재택근무를 해보기로 결심한 것. 당시 제주는 누적 확진자가 40명선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내가 갔을 적에는 비성수기인데다가 태풍이 겹쳐서 인구 이동이 거의 없었기에, 도내 확진자도 일 0명 수준이었다.


공항 가는 길은 너무나 무서웠다. 이동 동선에서 내가 전파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울에서나 제주에서 거의 집 안에만 있었다. (사실 나갈 수 있는 곳이 없기도 했다)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마스크를 벗지 않았고, 모든 교통수단은 택시로 다니며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으로 다녔다.


그렇다면 제주에 가는 명분은 가장 좋은 숙소라면 충분했다. 어차피 사람 많은 관광명소나 식당을 거의 가지 않을 것이고 실제 업무시간에는 일을 해야했기에, 내부 환경이 좋은 에어비앤비를 기준으로 숙소를 골랐다. 첫 숙소는 제주 애월읍의 시골 주택, 두 번째 숙소는 제주공항 근처의 펜트하우스 오피스텔이었다.


회 포장하러 가던 도중 들린 제주 카페. 제주의 예쁜 카페 탐방은 이 곳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제주에서도 재택근무의 환상은 없었다

역시나 일은 일이었다. 서울 집에서 하루종일 노트북을 하는거나, 제주 펜트하우스에서 하루종일 노트북하는 건 큰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풀벌레 소리와 제주 돌담길이 아름다워도, 일을 할 땐 시야에 모니터 화면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주변의 풍경은 크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월, 화, 수, 목, 금. 여느 때의 재택근무와 같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까지 기어가는 과정은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매일 점심은 간단하게, 일이 많을 때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계속 일만 했다. 전날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과일, 우유와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두어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보통 모든 동료가 사무실에 있는데 나만 재택근무를 하면 어느 정도의 불편을 느낀다. 나 혼자 회의 현장에 없으니 토론이 답답하게 느껴지거나 효율이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에, 내가 제주도에 있던 어디에 있던 생산성이 저하될 일은 없었다. 화상 회의를 할 때도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몰랐다. 딱히 제주도에 왔다는 자랑을 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업무가 태만해지지 않기 위해 일의 속도를 더 내려고도 했다. 기자분들의 자료 요청이나 문의에도 실시간 대응이 가능했다. 비행기를 탄 것이지 나라를 떠난 게 아니니, 자유로운 국내 통화는 멀리 있어도 빠른 대응과 논의를 하기에 충분했다.

인적이 드문 시골 에어비앤비. 태풍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 하나, 이렇게 살다가는 월급을 모조리 탕진할 것 같아서였다. 업무 시간에는 미친듯 일에 열중하고, 저녁 휴식시간에는 집 안에서 최대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다. 나에게 맛있는 식사라고함은, 단연 회다. 나는 회와 술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티슈 하나를 살 때도 최저가를 기어코 찾아 주문하면서도, 회와 술에 있어서는 가성비보다는 고급 퀄리티를 중시한다. 나에게 맛있는 회를 먹는다는 건 "내가 이것 먹으려고 그렇게 일하고 돈을 번다"는 문장이 성립한다고도 볼 수 있다. 회 천국 제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저녁 6시나 7시에 업무를 마무리하면, 근처 조용한 횟집을 가거나 구글에서 검색한 횟집에서 회를 포장해 숙소에서 거나하게 먹었다. 저녁에는 콜택시나 카카오택시를 부르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기에, 하루에 단 한 번 외출하는 순간에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모두 사와야 했다. 여담으로 제주에 있는 이 기간 동안 인생 최고의 회를 맛보았다. 횟집 이름도 최감독. 최감독님(사장님)의 권유에 속는 셈치고 지른 18만원짜리 자연산 다금바리였다. 제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최감독님은 이틀 연속 방문한 나를 숙소로 태워다 주시기도 했다.


회 먹기 위해 일한다


달콤한 6일 간의 제주 생활은 재택 퇴근 후 저녁마다 나를 봉인해제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니. 그렇게 회와 술로 가득찬 행복한 밤들이 흘러갔다. "제주에 내려와서 장기 재택을 할까?" "아예 제주에서 살까?"라는 말을 계속 입에 달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오래가지 않았다. 즐기는 일만 하다가는 위험도 따라오는 법. 문득 매일 저녁 이렇게 플렉스하다가는 월급이 남지않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코로나만큼이나 닥쳐왔다. 정신을 차리니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의지가 아니라도 받아들이는 연습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절대 재택근무가 불가하리라 여겼던 사람이다. PR 업은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이 많고, 이 생활에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성향 상, 원래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에 다녔어도 집에 있지 않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다녔을 확률이 높다. 심지어 사무실보다도 자유로운 카페에서 일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카페에서 일한다는 표현이 이제 과거형이 되어버렸다니!!)


누구의 자의도 아니게 덜컥 업무환경이 바뀌었다. 빠르게 현실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블루로 우울감이 왔다갔다할 때도 있지만,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사실 이 때다 싶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운영하거나 예전부터 미뤄왔던 일들을 모두 해결한 시기이기도 했다. 물리적인 체력을 덜 쓰는 대신, 정신과 고민의 체력이 한층 더해진 것이다.


사실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는 일상의 작은 변화일뿐이다. 물론 한 치 앞도 예측불가한 이 외부 변수는 나의 개인생활과 업무생활 모두를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불편과 좌절에 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집 근처의 가게가 하나 둘씩 폐업하고 있고, 그 공간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열렬히 응원하던 스타트업도 비즈니스에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너무나 힘들어하는데, 그 상황을 바라보며 어찌 도울 수 있는 바가 없어 더 안타까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확진자 수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마음 아픈 세상 소식도 더 늘어나고 있다. '살아간다'보다는 '견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2020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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