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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FRAU Jul 15. 2021

범람 주의

스위스 일기

(표지 사진 : Luzern, Schweiz / Photo by. @JOFRAU)


1

요즘 비가 많이 왔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국지성 호우’가 많이 왔다. 작년 여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유독 올해 비가 잦다. 그래서 여름이 아직 덜 온 듯하다. 햇살이 따갑고 호수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날씨는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물론, 아직 나만 호수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지만.


스위스에서 사귄 친구가 루체른에 놀러 오기로 했다. 날씨가 좋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이번 주 초부터 경고 알람이 계속 오고 있다. 범람 주의.



2

다행히 친구가 오기로 한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가 쨍 뜬 것도 아니었지만 최근 날씨에 비하면 화창한 편에 속했다. 다행이었다.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고 루체른 시내로 나갔다. 친구가 온다고 해서 미리 알아봐 두었던 카페가 있었다. 루체른 호수 근처에 있는 카페로 루체른 역에서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저장해 둔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호수 근처로 걸을 수가 없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안전상의 문제로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알람이 계속 울렸던 이유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범람 주의.



3

생각보다 물이 많이 불은 호수를 보고 친구랑 괜히 웃음이 났다. 어디에 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웃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내가 예상한 상황을 마주 했을 때, 둘째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 했을 때. 우리가 웃은 이유는 후자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리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제로 앞으로 비가 더 많이 오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지반이 평평하지 않아서 어떤 곳은 이미 도보와 호수의 경계가 거의 없어질 듯 아슬아슬한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한번 더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야 했던 길, 조심! / Photo by. @JOFRAU



4

물 구경을 제대로 하고 카페에 도착했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실외 테이블에 앉았는데 앉자마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서 우리는 바로 실내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꽤 있었고 다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규제가 완화된 것을 직접 겪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올해 첫 카페 실내 방문이었다. 스위스에서 방역 규제가 심했을 때는 카페 및 레스토랑은 거의 문을 닫아야 했고, 나중에는 테이크 아웃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직 인원수 제한이 있긴 하지만 실내 착석도 가능해졌다. 우리도 마스크를 벗고 주문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벗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수다 떠는 일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정말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 어색했다.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커피도 맛있고 케이크도 맛있는 카페라고 후기가 많아서 왔는데 웬걸, 케이크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인기가 많은 카페긴 한가 보구나 하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커피만 주문했다. 아이스커피, 라떼 마끼야또. 그래도 텅 비어있는 케이크 트레이 돔에 자꾸 시선이 갔다. 오늘은 어떤 케이크가 있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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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떨어지다가 해가 났다가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다가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우리는 커피 향 가득한 카페에서 오랜만에 서로의 일상을 묻고 들었다. 스위스에 와서 알게 된 인연인데 이렇게 계속 만나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는 일이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만날 사람은 만난다던데 우리의 인연도 그런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서로 나이도 같고 또 상황도 비슷해서 그런지 비슷한 고민도,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카페에 오기 전 호수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나 보다. 그 역시 비슷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다가 친구의 기차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카페에서 나왔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실내에 앉길 잘했다며 또 한 번 웃음을 나누고 물이 불은 호수를 보며 루체른 역에 도착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또 연락 달라고 아쉬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기차는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왠지 모르게 예전의 일상이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못하게 되고 그 일들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요즘의 일상에서 오늘 친구와의 데이트는 새로운 활기를 넣어주었다. 어쩌면 조금은 단순하고 무료했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가깝지만 새로운 곳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고 하는 일들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집으로 가는 S반*안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만 조만간 곧 벗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다시금 피어오름을 느꼈다. 

*S-Bahn : 지상철


물론 완전한 일상으로의 회복 전까진 오늘처럼 일렁이는 마음은 방심 금물, 범람 주의.



2021.07. 스위스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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