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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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하는 일을 앞두고 망설이는 편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조심성이 많다 혹은 심할 경우 쫄보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무언가를 처음 시도할 때 조금의 긴장과 함께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부러웠다. 딱히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두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어색해 보이지도 않을 때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나는 아직 한참 뒤에서 할까 말까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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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인가 6살에 처음으로 혼자 유치원에서 집까지 걸어갔던 적이 있다. 좀 크고 나서야 그렇게 멀지 않은 길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걸어도 걸어도 집이 안 나와서 덜컥 겁이 나기도 했었다. 왜 그날 혼자 집에 걸어가게 되었는지 그건 잘 생각나지 않지만 혼자 집에 걸어갔던 일은, 그때 그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 집 앞에 나와 계시던 할머니를 보고 울음이 터져 나왔던 것도 선명하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덜렁덜렁 씩씩하게 잘 오더니 왜 다 와서 울어.”하시며 꼭 안아주셨다. 그때 나는 씩씩하다 라는 말의 뜻을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집까지 혼자, 무사히, 잘 걸어오는 그런 것, 그런 걸 씩씩하다 라고 하는구나 하고. 아, 울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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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스위스에 와서는 온통 처음 해보는 일 투성이었고.
스위스에 와서 거주증을 신청할 때, 비자 갱신에 필요한 언어 증명서를 위해 언어 시험을 볼 때, 언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교에 등록할 때, 이사, 인사…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서툰 부분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 별 것 아닌 일들이었다. 왜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게 엄청난 큰 일 같고 못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랬을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고 이런 일이 있으면 저런 일도 있는 건데, 왜 그땐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온갖 의미 부여를 하며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걱정과 불안은 비로소 직접 마주할 때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처음 하게 되는 일을 앞두고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별 거 아닌 일을 별 거로 봤던 나의 여유 없던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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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때가 처음으로 유치원에서 집 까지 걸어갔을 때 딱 그 상황과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처럼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이곳에서 적응 잘하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 그 먼 길 끝에는 우리 집이 있었고 할머니의 품이 있었는데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이곳 스위스 일지, 한국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 도착해서는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집에 도착해 할머니 품에 안겨 울었을 때처럼 안도의 눈물이 나올지, 아니면 별 거 아니었다고 어깨에 힘 팍주고 오히려 할머니를 안아드릴지 많이 궁금하다.
아직 모르는 일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지금처럼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다 보면 결국 알게 되지 않을까?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고.
별 거 아니었다고.
한국에서도 이곳에서도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그런 거 아닐까?
같은 세상 아래에서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고.
‘처음’이 주었던 조금의 긴장과 떨림이 사실은 설렘의 두근거림이었을지도 모른다.
2021.07. 스위스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