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스페인)
표지 사진 : Photo by. @JOFRAU
서둘러야 했다.
전날 오후 느지막이 바닷가를 찾았던 남편과 나는 내일은 꼭 오전에 바다를 가리라 다짐했다. 여유 있게 도착한 바닷가에는 자리를 잡기도 어려울 만큼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도 느꼈지만 신기하리만큼 이전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모두가 올해 여름을 기다린 것처럼 그렇게 활기가 넘쳤다.
조식을 든든히 먹고 바다로 향했다. 어제와 다른 바닷가를 가는 길이라 그런지 오늘의 두근거림은 또 새로웠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사람이 이미 많았기 때문에 금방 주차장을 찾을 수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는 차를 보고 남편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오전 10시 반인데 도대체 몇 시에 나와야 하는 거지?!"
차를 주차하고 목적지인 Caló Des Moro로 향했다. 맵을 확인 해보니 주차장에서 15-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우리는 어느새 뜨거운 햇빛을 식혀줄 시원한 바다를 향해 가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함께 걸어갔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쎄--한데"
근처에 다른 볼거리들이 있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보다 앞에서 걸었던 커플도 잠시 서서 되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더니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그들과 우리를 포함해 바닷가 쪽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앞에 있던 커플이 되돌아오던 사람들 중 한 일행에게 무언가 물어보더니 방향을 바꿔 같이 되돌아갔다. 남편과 나는 또 서로를 쳐다봤다. 어느새 바다를 향했던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도로에 남편과 나만 남게 되었다. 물론 같은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만 가면 안 되는 곳으로 가는 거 같아서 조금 찝찝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일단 계속 걸었다. 생각보다 험준한 코스에(갑자기 등산 코스) 진짜 잘못 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그런 생각은 솜사탕이 입안에서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와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고 눈앞에 펼 쳐진 에메랄드 빛 바다를, 지중해를 두 눈에 가득 담으려 노력했다. 어디가 끝인지 시작인지 모를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뜨거운 햇빛이 바다와 만나 물 위에서 더욱 반짝였다. 여행의 초반부였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스크린숏을 해서 저장해 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오늘, 이 순간, 이 시간에 만난 바다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눈부신 바다를 구경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해변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들어가는 인원수를 제한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효율적인 운영인지는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바다의 모습에 반한 나에게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줄은 생각보다 꽤 길었고 생각보다 느리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먼저 접한 사람들이 되돌아갔던 것이다. 이 섬에는 여기 말고도 예쁜 바다가 정말 많으니까. 그날그날에 따라 바다를 골라 다니는 삶이란.
"한 시간 예상한다."
남편이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려는 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햇빛 아래 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어느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린 사람이 없었다. 우리처럼 줄을 서서 해변에 들어가는 일이 어색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각자 만의 방식으로 기다림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가, 수다를 떨었다가, 묵찌빠를 했다가... 우리 방식으로 기다림을 즐겼다. 다행히 남편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차례가 되자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데 왜 줄을 서서 천천히 들여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해변 출입구가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길이 거의 절벽이었고, 이미 해수욕을 마치고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위험하기도 했다. 나는 땅에 엉덩이를 붙여가며 엉금엉금 천천히 내려갔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내딛으며 도착한 우리는 바다에 비해 정말 좁은 모래사장에 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모래사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비치타월을 펴면 '자리'가 되었다. 우리는 비치타월을 펼쳐 자리를 만들고 선크림을 바르고 준비운동을 하고(?)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너무나 맑고 투명한 바닷물을 온몸으로 느끼며, 디즈니 인어공주 OST를 콧노래로 부르며, 부서지는 햇빛을 기분 좋게 맞으며 점점 바다로 들어갔다.
올여름 가장 기억에 남는 바다였다.
여행일기 (2021.08. 스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