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일기(루체른 호수)
(표지 사진 : Le Jardin du Luxembourg, Paris, France / Photo by. @JOFR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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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고시 발표가 났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결과를 확인하고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데 마지막 장면에 남은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임용 준비할 때 혹시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 시험에 대해서는 오로지 나에게 맡기시고 묵묵히 뒷바라지만 해주셨던 부모님과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오랜만에 집에 갔을 때면 집에서 무슨 공부냐고 쉬라고만하시던 우리 할머니. 그런 모습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정말 많이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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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나고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원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들려오는 누구의 합격소식, 누구의 불합격 소식을 들으며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축하를 해줬다가, 위로를 해줬다가 또 위로를 받았다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며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채 떨쳐내지 못하고 홀린 듯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미뤄두었던 유럽여행을 지금 가야겠다고 확신을 심어준 건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셨다.
"한 달 정도 유럽여행 다녀올래? 티켓은 엄마가 해주고 싶은데."
두 달 정도 보내주고 싶지만 그러면 엄마가 너무 걱정이 될 것 같다고 혼자하는 국내여행 허락도 잘 안 해주셨던 엄마가 먼저 물어보셨다. 나는 "갑자기 무슨..." 하며 멋쩍게 웃었는데 아빠가 말씀하셨다.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비행기 티켓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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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설레는 마음이 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아직 묘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이런 기분으로 유럽여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생은 정말 계획대로 되는 게 없다. 옷을 좀 더 불편하게 입고 올 걸 너무 편한 트레이닝 복을 입었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 때로 보이는 여성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거셨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창가 쪽이라서... 저 들어갈게요."
내 옆자리 창가 쪽의 승객이셨다. 그 말을 시작으로 그분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얼마나 여행을 할 계획인지, 유럽은 처음인지 등. 이상했다. 여행을 하면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거 같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행을 많이 다니셨나 봐요. 저도 좀 더 편하게 입고 올 걸! :D"
"아... 그게..."
나는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너무 편하게 입은 거 같다고 후회하는 중이었어요!"라는 말을 못 했다.
유쾌하셨던 내 옆자리 창가 쪽의 그분은 여행이 어떠셨을지 모르겠다. 영국으로 가신다고 들었는데 좋은 여행이 되셨길 바란다. 말도 안 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같이 이야기 나눠줘서 고맙다고, 여행기분이 들게 해 주셨던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처음 만났던 그쪽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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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룩셈부르크 공원에 도착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 비하면 너무 과대평가인가 싶지만, 도심 안에 드넓은 공원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억에 꽤 많이 남는 곳이다. 내가 룩셈부르크 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3시쯤이었고 날이 무척 좋았다. 나는 웬만하면 아무리 날이 좋아도 답답해서 선글라스 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눈부심도 그런대로 괜찮다. 그런 내가 선글라스를 꺼내 쓸 정도로 햇살이 정말 눈부셨다. 햇살에 비친 물만 반짝반짝한 게 아니었다. 나무도, 분수도, 건물도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 반짝반짝했다. 빈자리가 있는 벤치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앉을자리를 찾으려고 공원을 꽤 돌아다녔다. 마침내 자리가 비어 있는 벤치를 찾아서 거기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 따뜻한 햇살 속에서 따뜻한 아니 뜨거운 커피라니. 커피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커피가 식기는커녕 햇살 때문에 보온 유지가 더 잘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주하고 있는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서 뭘 하는 걸까. 나처럼 늦은 점심 혹은 간식을 먹는 사람들도 있고, 친구들과 나들이 온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데이트하는 커플들도 있고,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고, 책을 읽고 또 그림을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시간을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시간에 한국에서 뭘 하고 있었더라.'
혼자 책상 앞에서 수많은 전공서적과 교재, 빽빽한 자료 속에 파묻혀 오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붙여 놓고 하나씩 지워가는 낙으로 지냈던 시간들이 불쑥 떠올랐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내가 할 일은 많은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보냈던 걸까. 나는 매일 오후 3시에 책상 앞에만 있었는데 그게 지금 나에게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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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가 해야 하는 일들로 꽉꽉 채우면서 잘 해낸 일들에 대해서는 뿌듯함도 느끼고, 잘 해내지 못한 일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채찍질도 해가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비록 결과는 내가 바라지 않았고 또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그 과정은 뿌듯했다. 그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내 과정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계속 묘한 기분에 휩싸였던 것도 그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래서 여행을 가나 보다 싶었다. 내가 속하지 않았던 곳에서 떠올린 나의 모습이 처음에는 여유 가득한 이곳과 너무 달라서 한 없이 작게 느껴졌는데 점점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힘들었지만 견뎌냈고, 받아들이기 싫어서 도망치듯 여행을 왔지만 회복하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 더 단단해질 내 모습이 기대가 되었다. 단단해지고 있다고, 이런 일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 더 넓은 세상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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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나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인생 진짜 모른다. 도망치듯 여행 갔을 때 봤던 룩셈부르크 공원 풍경이 루체른 호수에 겹쳐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날 그 공원에서 보냈던 나의 시간은 지금도 선명하고 앞으로도 잊기 어려운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떻게 그날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불합격 통보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던 나의 지난날들이 어떻게 추억이 되었을까.
2021.05. 스위스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