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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

by 조각 모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외국어로 밖에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중국어로 된 두꺼운 법학책을 들고 앉아 읽고 외우고 적으며 머릿속에 욱여넣었었다.

그때 친구들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게 한국말이면 이거에 두 배가 되는 것도 다 외울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이곳 군대에서, 내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선임 조교님으로부터 <제식>이라는 이름의 책을 전달받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외워"라고 하셨다.


그냥 외우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훈련병들을 모아두고 완벽하게 수업도 진행해야 한다.

심지어 공부만 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중간에 있는 훈련과 작업, 경계근무도 서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참에 공부하는 새로운 습관도 익혀본다고 생각하자.

한국말로 암기하는 연습과 외운 것으로 강의하는 연습도 해보자.


한국어로 암기하는 법도 터득되면 그게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궁금하다.

또 한 번 허물을 벗기 위해 아등바등거려 보자!




조교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강의'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 시험은 가르쳐야 하는 책의 내용을 모두 외우고 동작도 해야 했다.

이걸 선임, 간부님, 중대장님 앞에서 세 번에 걸쳐 시험을 쳐서 모두 통과해야만 진짜 조교로 임무 수행을 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조교 모자와 조교 벳지를 줬다. 진짜 조교가 되는 것이었다.


조교마다 그 과정이 차이가 나겠지만, 내가 있던 곳은 몇 개월간 이걸 시켰고, 그 기간 동안은 쉬는 시간에 노는걸 거의 금지하다시피 했다.

선임들 눈에 너무 자주 쉬고 있다 싶으면, "오늘 테스트 한 번 보자"라고 했고, 삼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테스트에 말이라도 더듬으면 바로 "여태 그거 하고 쳐 놀고 있었냐?"라는 말이 날아왔다. 때론 책도 함께 날아왔다.


위 글을 적은 날은, 내가 암기해야 하는 책을 받은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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