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학기, 첫 대외활동을 구하다
1월, 이력서와 미대생, 그리고 경력사항
그렇게 결심한 후, 우리가 취업 준비를 하며 가장 먼저 서게 되는 벽 중 하나는 바로 이력서다. 전공과 학점은 잠시 머쓱하게 접어두더라도, 이어서 마주하게 될 파트인 경력사항이 높은 벽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신입이라면 대외활동, 학생회 경험이라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와야 하는 그것. 그쯤이야 알았지만, 그래서 미대생인 내가 해온 활동은 무엇이 있었을까?
2020년 1월, 취업을 준비해보겠다고는 했지만, 당시에도 자신은 없었고 아는 것은 당연히 없었다. 해본 것이라곤 사람인을 들락거리며 적으라길래 적었던 이력서 항목 몇 개 채우기 뿐. 원하는 직군 앞에 눈을 끔뻑이며 3D, 디자인, 마케팅… 등을 택하고, 자격증, 토익 점수 등은 그저 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미뤄왔을 뿐인 바로 그 이력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껏 피해온 현실을 마주하고자 다시금 사O인 기본 이력서에 채워본 문항 내용들은… 처참했다. 유학 경험 무(*학교 공지를 발굴해 신청한 2주 간의 홍콩 특강이 있기는 하지만, 2주라는 기간은 조금 머쓱할 따름이었다.), 영어 성적 무라는 사실까지도 둘째 치고, 내가 해온 경험이 이렇게나 적다는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과인 동창이 왜 2학년 때부터 그렇게 서포터즈와 해외봉사를 다녔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던 순간이었다. 그 때 나는 그 모습을 저멀리서 바라보며, “나에게 맞는 일”, “내가 진심일 수 있는 일”…의 존재를 공상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른들의 말을 반 정도는 따라 3학년에 뭐라도 시도해본 결과, 당시 내가 적을만한 활동으로는 학생회에서 한 인권 미디어 활동과 미디어아트 공모전 수상 경력 하나가 있었다. 그러나 인권 미디어 쪽은 페미니즘에 주로 관련한 활동이었으므로 관련 분야가 아니라면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고, 공모전 수상은 순수미술 분야의 일이었던지라 이력서에 적자니 여간 곤란한게 아니었다. 혹여나 질문이 들어와 내가 무엇으로 수상했는지를 경영인들 앞에서 발표해본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순화를 거친다 해도 벌써부터 어색한 정적과 식은땀이 느껴졌다.
물론 내 인생에는 창작활동을 하며 깨달은 좋은 경험이 수도 없이 있어 왔지만, 이외에도 조금은 인생의 스토리텔링을 추가해줄 필요가 있었다. 기업의 인재상은 괜히 있는게 아니고, 이제 채울 내용들은 완전 초짜신입인 내가 당신의 회사에서 이런 능력을 펼칠 수 있다 말하는 첫 관문이었으므로. 나의 지난 3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내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독단적이거나 공상적이지 않고' 제법 쓸만함을 증명해내기 위해 나는 대외활동을 먼저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어떤 활동으로 시작할지는 어떻게 선택할까. 물론 대외활동 선택에는 답이 없다. 이왕이면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야나 직무 종류가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에는 그 곳의 경험을 어떻게 번안해내는지의 문제니 말이다. 그러나 그 전에 몇 가지의 기준을 세워볼 수는 있겠다. 나의 경우는 이렇게 했다.
1. 나의 관심사 키워드를 필터링없이 설정해볼 것, 단, 직업이 아닌 것으로. 그리고, 미술과 관련이 크지 않은 곳으로. (ex. 지역, 환경, 로봇 등)
2.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특정 분야에 한정 짓지 않을 것. 관심사가 맞다면, 갑자기 코딩을 하는게 아닌 이상에야 도전해볼 것.
1번을 상정한 이유는 내가 커리어 전환을 하고자 한다면, 이미 전공에서 갖춰진 미술 관련 경험 대신 다른 업계의 경험을 해보는게 옳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2번은 대외활동의 큰 순기능인 내가 모르는 역량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대외활동 자체는 주로 블로그 기자단, SNS 마케팅, 유튜브 콘텐츠 등등의 디지털 활동으로 이루어지기에, 업무 선택의 폭이 넓다고는 할 수 없으며, 업무의 내용이 이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대신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의 경험에 더하여, 내가 그래서 그 업계의 대외활동을 왜 지원했고, 거기서 발휘된 나의 장점과 그로 인한 성과가 무엇이었는지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런 활동이 주가 된다는건 당신이 약간의 포토샵과 프리미어를 할 줄 안다면 이 전환의 기회를 찾기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하여 쉽게 보면 큰 코 다친다. 대외활동도 경쟁률이 상당하며, 주관사가 큰 곳에서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뿐만 아니라 면접까지 보니 말이다.)
물론, 대외활동은 어쩌면 그렇게 필요한 활동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스토리텔링을 위한 재료가 되어주기는 하지만, 자격증이나 시험 점수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사실은 정작 나도, 대외활동이라 할 만한건 아무것도 몰랐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지원한 영화사 서포터즈 활동과, 4월 경 지원한 지역문화 크리에이터 활동 두 가지 뿐이었다. 그럼에도 추천을 해보는 이유는, 앞으로 어찌될 지도 생각치 못하고 막연한 관심사와 약간의 야심으로 시작한 이 두 활동이 이전 내 학생회 경험과 엮여 내 관심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커리어 루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가 무엇보다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다"는 마인드의 변화였다.
다양한 배경과 과정, 목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배우며, 미술 외의 일을 성공해보는 경험은 취업시장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그었던 선을 지우는 계기가 되었고, 내가 미술로 하고자 했던 일들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법의 실마리를 주었다. 돌이켜 내가 미술을 했던 이유는 "내가 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의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연유대로 학생회에서 인권 미디어를 제작하고, 영화 리뷰어로 활동했던 경험들은 사람들이 보다 이해하기 좋게 콘텐츠를 다듬는 능력을 내게 남겼고, 그 경험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대외적인 영상 제작 경험도 없이 지원한 지역문화 크리에이터 활동은 지역예술에 대한 내 관심사를 숏 다큐멘터리 콘텐츠로 제작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언론사 인턴의 결정적 열쇠가 되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이을 예정이다.)
더하여 이런 활동들을 알아보며 좋은 점은, 세상에 어떤 기업들이 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달리고 있는지 대강이라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링O리어와 위O티에는 온갖 공모전과 컨퍼런스, 서포터즈를 스크랩하는 동년배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당시 기준없이 온갖 활동 정보를 찾아보며 내가 새삼스레 놀란 것은 제약 회사, 운동기구 회사에서도 디자이너가 필요하고, 연구소에서도 사보 기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취직을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 눈을 넓혀야만 한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체감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물론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이는 우리가 아는 곳들만이 아닌 우리가 모르는 곳들에서도 우리의 능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걸 보다 친절하게 체감하는 첫 번째 경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을 바꾸는 방법도 있지만, 어쩌면 업계를 바꿔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일들을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앞서는 추천의 변만 가득했지만, 물론 여기에도 주의해야할 점이 있는데, 아무리 무리없는 활동이라 할지라도 대외활동의 경계가 애매한 만큼 이또한 무작정 선택해서는 안 된다. 대외활동 또한 이런 면에서는 취업과 비슷해서, 우리가 알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기업/기관이거나, 소정의 활동비라도 주는 곳이 조금 더 좋은 환경과 서류 상의 이점을 제공한다. 또한, 미대생으로서 우리가 아주 잘 알고있다시피, 콘텐츠 제작의 영역이 '적당히 일하기'가 애매하다보니, 거의 외주급의 노동력을 요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이 끌린다면 해야만 하는 일들도 있겠으나, 이왕이면 비슷한 활동들 사이에서도 활동비라도 조금 더 주는, 당신에게 조금 더 유리한 활동을 선택하시면 좋겠다. 우리의 경험만큼이나 우리의 시간과 노동력도 소중하니까.
대외활동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내 장점을 알고 그것을 사회적 활동으로 바꾸는 경험을 하며 내가 깨달은 것은, 취업시장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미대 출신이라는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자기객관화가 필요한 때와 우선 선을 넘어보는 순간은 구분해야 하지만, 미대생들은 조금 더 발디뎌보길 택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성공의 경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스펙도 차치하고, 당시 내게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 성공의 경험이었다. 어쩌면 미술대학을 다니며 내가 체감한 것 중 하나는 무력감의 경험이었다. 미술대학을 선택하기까지 각자의 과정이 있겠지만, 한국의 사회상 아래 우리가 공유하는 미술대학 입학의 일련의 루트가 있다. 미술에 대한 막연한 호감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편입되는 강압적인 입시 문화, 그리고 상상과는 참 다른 교육과 미술계의 열악한 노동환경까지. 그렇게 한 시기를 미술과 질척하게(?) 엮이며 어쩌면 우리에게는 비전과 목적보다는 선택을 부정하고싶지 않은 오기가, 가끔은 대체 이 졸업장으로, 이 경험으로 무엇을 하냐는 자조가 남았을런지도 모른다.
내가 미술로서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취직을 결심하기 전 시작한 첫 번째 질문은 그것이었다. 미술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내가 미술을 좋아했던 이유를 다시금 상기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미술로서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서부터 나의 진짜 목적과 관심을 알아내야 했다. 사실 활동 경험이란, 그 자체로는 정말 작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내 경력을 포장하고자 시작한 질문과 거기서부터 시작한 활동은 결국 내가 원하던 것, 미술로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갖고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써도 해낼 수 있는 것인지를 밝혀낼 수 있게 만들었고, 그렇게 지금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발끝을 약간 담가본 지금 내게 또 새로운 목적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니 사실 대외활동의 첫번째 의미는, 미술계 밖을 둘러볼 첫 번째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우리가 미술을 하며 배운 것은 '미술품을 생산해내는 능력'만이 아니라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미술을 해온 이유를 번안해내야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말 '미술' 뿐이었을까? 내게 맞는 활동을 찾는 것은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이야기 : 미대생이여, 정말 대학원이 가고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