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의 준비된 일꾼이 되겠습니다. 아, 석사는 물론이죠!
스펙 점검 20만원의 추억
조각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하기도 전, 막연하게 그린 미래의 선택지 중에는 당연하게도 대학원, 그 중에서도 예술경영 대학원이 있었다. 미술계 밖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미대생의 단골 선택지인 대학원 진학 중에서도 떠오르던 이 문화예술경영이라는 전공은 미술계에서 ‘직장 같은 직장’을 가지기 위한 최선의 선택지로 여겨지곤 했다. 나또한 그런 흐름으로, 학부때 복수전공을 하지 못한 예술경영을 대학원에 가서라도 전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다. 석사 학위가 필수로 여겨지는 갤러리와 문화재단의 생태를 어렴풋이 알게 된 이후로, 막연하게 졸업 후에도 미술계에서 튕겨나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일종의 도피처처럼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후 문화계의 거의 모든 인프라가 서울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다가, 출신지가 문화재생으로 힙한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한 근 몇 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비서울 출신의 전공생으로서, 내게도 예술계에 여전히 만연한 서울중심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나름의 목표가 생기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 막연한 목표에는 지역 문화재단 취직이 가장 최적의 선택지로 생각됐고, 미술계의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서는 역시 석사 학위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무작정 대학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부터는 관련된 웹진과 학회지들을 구독하며, 대학원 커뮤니티에 가입해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2019년 경 예술대학생 네트워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예술계열 대학생들의 졸업 후 문화예술계 종사 희망 정도는 94.3%에 달했다. (응답 수 2,157 중)
그러나 대학원은 웬만하면 진학 가능하다는(그러니 진학하라는) 학부의 구슬림과는 달리, 대학원 입시 카페의 분위기는 치열했다. 대학원 도피도 쉽지 않다는걸 깨달으면서 내가 목격한 또다른 신세계는 대학원도 입시 컨설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유학도 아니고 국내 대학원까지 입시 컨설팅이 있다고? 심지어 각 학과별로 전문 컨설팅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을 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 새삼 당황하면서도 나는… 걸려들었다.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시기에, 고민과 회의도 약간의 과도기에 접어들며 나는 수용의 극단에 치달아 있었다. 할 수 있는건 무엇이든 해보자는 결심은 어느새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따라야 하는걸지도 모른다…"는 휩쓸림으로 번져 있었고, 불도저같은 심정으로 무작정 문의를 작성했다. 빠르게 답신을 준 친절한 ‘컨설팅 전문가’가 제시한 한 시간의 컨설팅 비용은 20만원이었다.
어쩌면 적은 돈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마 내 스펙의 부족함과 컨설팅이 열어줄 가능성에 대한 연설로 채워질 1시간의 상담의 내용이 어렴풋이 그려졌는데, 그렇게 '맛보기'로 내 불안만 자극한 후 이를 빌미로 이어질 수업료는 더욱 비쌀 것이 분명했다. (*이후 찾아본 한 기사에서는 이러한 컨설팅의 금액대가 300만원 대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순간 주춤했던 나는 멋모르는 학생의 전화를 갸륵히 여긴 상담사의 친절로 컨설팅비를 15만원으로 인하받기까지 했으나, 예약금을 입금한 뒤에도 굳이 당장 이렇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불안을 놓지 못했다.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결국 상담 예약을 취소하고 15만원을 돌려받았을 때야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조바심에 휩쓸리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약간의 기시감이 들어왔다.
예고와 미대 입시를 겪으며 배운 것은, 학원들은 가스라이팅의 귀재란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친절한 말투로 나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은 어디선가 많이 본 수법이었다. 아마 내가 아닌 화려한 스펙의 누군가라도 그 하나의 불안 요소를 잡아 끌어들였을 테였다. 얼떨떨한 마음에 대학원 커뮤니티에 익명의 글을 올리자, 사람들은 예약금에 당황하며 “굳이 컨설팅을 받을 필요까지야 없다”고 답했다. 나는 너무 쉽게 휩쓸려 있었다. 한 번 쓴 맛을 본 이후, 대학원 입시는 우선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해보기로 했다. 본래 그래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대학원 입시 후기를 둘러보며 업계별로 대학원마다의 준비 방법도 참으로 다르다는걸 처음으로 알았다. 이렇게 내던져진 우리에게 하사될 학원의 효용을 어느정도 믿기는 했지만, 학원의 불안 장사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후, 조바심을 가다듬고 진짜 공부는 현장에 있다는 생각에 관련 활동들에 참여했다. 입시 컨설팅이라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게 되었지만, 현장을 조금이나마 엿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나는 막연히 이후 미술계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가야할 것이라 생각했다.
미술계와 척척석사
교수님은 우리에게 석사를 권하셨죠
왜 막연히 미술계는 석사가 필수라 생각했을까, 그건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미술대학에서는 석사 학위가 비단 학문적 연구를 위한 전문직만이 아닌 미술계통 전반의 취업을 위해서도 권장되는 사항이며,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나마 가장 확실한 미래로 그려졌던 것은 대학원이니까.
미술을 계속 하려면 석사를 해야한다는 풍문과도 같이, 2019년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한 서울 청년 예술인 회의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666명의 응답자 중 33.2%가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재학까지 포함하면 53.3%의 비율로 집계되었다.(*물론 이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청년예술이란 키워드에 관심이 있는 응답자들이 주된 비율이겠으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예술계 종사자의 석사 비율이 상당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예술계에서 학위란 취직을 위한 스펙은 아니며, 실기과나 정통 이론과 진학률도 상당수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도 이왕이면 석사까지 진학해, 학부때는 다 배웠다 말하기 어려운 예술을 마저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 미술계의 모집 공고들 대다수에도 또한 어김없이 석사 소지자 우대가 표기되어 있다. 한 해 몇 천 명이나 더해지는 미술대학 졸업생의 수, 그리고 수많은 미술계열 종사 지망생의 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인지, 미술'계'라는 내부의 벽은 점점 높아졌다. 어떤 직무든 앞으로 미술이란 학문을 업으로 이어가는 사람이 되는 일이니, 일종의 연구직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석사 학위에 영어 능통자 우대라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월 150도 되지 않는 월급으로 일하게 하는 미술계의 말도 안되는 환경은 참으로 비상식적이었지만 말이다.
근래 한 문화재단에서 예술계통의 몇 안되는 공모전의 참여 자격을 석사 이상으로 명시해 비판을 받았던 해프닝은, 일반 학부생에게 점점 더 장벽이 높아지는 예술계의 학력 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는, 보다 이른 경험과 공부에 대한 고민이 주어지기 전에 그저 2000만원의 돈을 더 투자해 석사를 해내는 것이 권장 사항이 되었다.(*이 와중에 예술계열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장학금 현황 또한 타 계열에 비해 열악하다.) 대학에서는 예술가라는 직업과 행정적 업무들에 대한 고민보다는 오직 작업에 관한 고민을 시사하는 것이 전부였고, 그렇게 어느새 경험없이 졸업해버린 우리는 쫓기듯 실무과의, 이론과의, 예술경영 학과의 석사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얕게나마 공부와 취직 준비를 병행하며, 그 무렵 대학원에 대한 내 고민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예술경영이 하고싶어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예술계라는 업계에서 무엇을 바꾸고자 하는 일인가요?
한창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하고 귀가하던 5월 경의 지하철에서, 한 종사자 분은 내게 예술경영을 배우고싶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관련한 공부도 하고 있고, 나름의 프로젝트 경험도 쌓고 있으니 이제 밀고 나가야겠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생각지못하게 말문이 막혔다.
내게는 내가 사는 도시의 문화적 발전이라는 목표와, 그 발전에 반영하고픈 가치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문득 들어온 생각은, 내게는 그 목표에 '미술'이란 수단이 빠져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미술계여야 했던 이유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내가 전공한 그 일일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내게 미술계라는 업계에 대한 고민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보다는 미술로서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직장을 잡는 방법을 찾는 일이 우세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미술에서도, 졸업에서도 회피하고 있었다. 미술을 하고싶은 이유는 희미했으나, 큰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단 미술계에서 버티고싶어 한 타협의 선택이 내게는 대학원이었다. 아마도 그런 나는 앞으로 대학원에서, 미술계에서 배우기보다 그저 어영부영 버티는 일을 우선할 것 같았다. 종사를 희망하는 사람으로써 미술계라는 업계의 환경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 어떤 역할을 하려 하는가, 그런 고민이 우선하지 않고 지금의 선택을 이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니, 내게는 미술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큰 물결을 맞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때도 여전히 미술에 미련이 남는다면, 다른 업계에서의 경험을 미술계에서 오히려 이롭게 적용시켜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의 좁아진 시야 대신 새로운 일들을 경험해봐야 함은 확실했다.
질문을 건내주신 분께 솔직한 대답을 한 후, 나는 비로소 미술 말고 다른 것을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첫번째로는, 무작정 대학원에 가기보다 먼저 사회에 나서보기로 말이다.
다음 이야기 : 예술계 취업자료를 조사하며
***시험 준비로 다음 편은 2/9에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가)업데이트는 설 주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설 전 긴급마감을 예상치 못한 탓에 번복하게 되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