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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Apr 15. 2020

세상은 내게 결코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내성적인 글쓰기

웃지 못할 우스개를 들었다. 코로나19로 내성적인 사람들이 평온을 되찾고 있다는 이야기. 모임, 회식, 미팅 등을 제한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그동안 저마다의 의무로 ‘사교의 얼굴’을 꾸며내야 했던 사람들에게 얼결의 자유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감염병으로 인간의 생산 활동이 감소하는 사이에 공기의 질이 높아졌다거나 운하에 물고기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비극 속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 또한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생계에 타격을 받는 프리랜서 중 하나인 동시에,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부대끼는 일이 줄어드니 내심 속이 한갓진 것도 사실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나가기 싫은’ 상황보다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차라리 편한 면이 있다. 적어도 자책감은 덜하니까.


사회적 거리 두기는 그동안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감각을 다시 설정하는 일이었다. 나서라, 만나라, 누벼라 외치던 세상이 두 계절의 팬데믹을 통과하는 동안 나서지 말고, 만나지 말고, 누비지 말 것을 강제했다. 놀라다가, 얼떨떨하다가, 두렵다가, 슬프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우리는 그동안 왜 그렇게 자주 악수를 하고, 어디를 그렇게 분주하게 다녔던 것일까. 그 회식들은 정말 필요했을까. 그 경조사엔 꼭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와야 했을까. 그 빼곡하던 술자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소속감과 친화력을 중시하는 사회일수록 내성적인 사람들이 짊어지는 부담이 커진다. 활동의 반경이 곧 경쟁력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 멀리, 더 넓게, 더 많이, 에너지는 외부를 향하도록 독려된다. 에너지가 밖으로 뻗기보다는 안에 머무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겐 유리하지 않다. 그들은 ‘그런’ 세상에서는 조금 더 애를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언제나 몇 걸음은 더 움직여야 하고, 몇 마디는 더 말해야 한다. 몇 번씩은 더 웃어야 한다.


‘거리’는 본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조건이다. 그들은 틈과 간격 속에서 판단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듣자마자 대꾸하고, 말하자마자 행동하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다. 말보다 글이 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글에는 내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틈과 간격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바심이 생기지 않고, 내성적인 사람들의 에너지는 조바심이 없을 때 발휘된다. 첫 직장이었던 학교에서 일할 때 실감한 일이다.


30명 남짓 되는 교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이른바 ‘리액션’이 크고 빠른 학생들이었다. 교사의 말이 좋든 싫든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아이들이다. 학기 초반에는 ‘그 그룹’을 기준으로 해당 학급을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매년 5월 교내 백일장 기간이 돌아오면, 심사를 하던 나는 항상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거르고 걸러져 남은 원고의 주인공들은 내가 단박에 ‘아, 그 반의 그 애!’ 하고 매칭하지 못하는 이름일 때가 많았다. 또렷이 구별되는 사유와 문장을 거침없이 풀어놓은 그들은 교실에서는 그렇게 ‘구별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심사를 마치고 나면 수업에 들어갈 때 그들을 다시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별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든든히 결속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네가 원고지에서
날아다닌다는 걸 알고 있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교감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 덜한 게 아니다. 다만 빨리, 한꺼번에 하지 못할 뿐이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리는 데 적절한 틈과 간격 속에서 그들은 더 깊고 단단한 통로를 낸다. 글쓰기도 그렇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따지기 앞서, 글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확보되는 ‘거리’가 쓰는 사람을 안심시킨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물러섰다가 한 번 더 고민한 뒤에 한 걸음만 나아가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학교 복도를 걷고 있으면, 저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 뛰어와 얼싸안으며 애정을 표현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 눈 밑에 붙은 속눈썹을 떼어주던 아이들. 그 천진하고 또렷한 마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던 학생이 돌연 작심한 듯 쥐어주는 편지를 나는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미터의 거리 속에서 봄의 벚꽃을 보냈다. 30년 가까이 제 방 밖을 나가지 않았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책상은 벚나무로 만든, 가로세로 45센티미터의 정사각형이었다고 한다. 디킨슨은 자신을 찾은 사람들과 응접실 문을 사이에 둔 채 대화했으며,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고집스럽게 은둔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작은 책상에서 1700편이 넘는 시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리가 몇 미터이든 그가 가닿고자 하는 거리는 그보다 멀다.


이것은 세계에 보내는 편지야
세계는 결코 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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