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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May 20. 2020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미움받는 글쓰기

오래전에 직장에서 한 동료가 나를 아주 싫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와 나는 통상의 업무에서 한 단계를 협업하는 사이였다. 업무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한 적이 거의 없는데 ‘굳이’ 상대방이 좋고 싫을 게 뭐가 있는지 우선 놀랐고,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이라니 나 또한 유쾌하진 않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알고 보니, 바로 그 ‘업무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한 적이 거의 없다’는 데 화근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른 동료들은 업무 협조를 요청하거나 요청받을 때 간단한 안부(“요즘 계속 야근하시는 것 같던데 피곤하시겠어요.”)라든지 근황(“주말엔 뭐 하셨어요?”)이라든지 하다못해 날씨(“요즘 갑자기 추워졌네요. 감기 환자가 많대요.”) 얘기라도 건네는데, 이윤주 씨는 그런 ‘스몰 토크’라곤 일절 없이 일 얘기만 하다가 볼일 다 보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그런 식으로 일해왔고, 그런 방식이 이른바 ‘사회생활’에 그다지 유익이 되진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람을 ‘싫어하게’ 만들 이유가 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만 잘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일을 잘하기 위해선, 특히 함께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안부와 근황과 날씨가 포함된 스몰 토크를 나누면서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향의 차이, 일하는 스타일의 차이니까. 그런데 이 또한 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스몰 토크를 시도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 대한 ‘무시’라고 그는 여겼다. 이쯤 되니 나도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서로 인정하면 되지, 감정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가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도 나는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스몰 토크를 말이다. 그것만 해주면 그에게 미움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하기 싫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게 미움을 산다는 게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스몰 토크를 죽어도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게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그게 또 뭐라고, 맘이 내키면 그냥 한두 마디 해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겨우’ 스몰 토크 때문에, 한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미움’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에게 나는 구태여 ‘호감’을 얻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그의 미움은 미움으로 내버려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나쁘게 생각해도 그걸 바꾸려고 애쓰지 않게 되는 상황이 점점 많아진다. 나이가 드니 인간관계가 부질없게 느껴진다거나, 사람에게 공을 들이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나와 정서적으로 긴밀한 사람들을 나는 끊임없이 염려한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내게 옮아오며, 나의 기쁨과 슬픔 또한 그들과 결속한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처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일 또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데는 (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만의 이유가 있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어찌할 수 있다 해도, 어찌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나 마음이 내게 없다면, 또다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나의 발목을 잡지 않게 되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다.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어디서나 호인(好人) 소리를 듣는 사람은 경계하게 된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어느 누구의 세계관과도 충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보이는 경우라면 두 가지일 것이다. 그가 ‘미움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세계관을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그에게 세계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건강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는 것은 미움받을 짓을 사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글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향해) 소리친다. 자, 나의 세계관은 이러하다. 당신의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과 충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결혼하지 않으면 이혼할 일이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실연할 일이 없듯, 굳이 쓰지 않으면 나의 세계관이 당신의 세계관과 충돌할 일도 없다. 하지만 이혼이 없고 실연이 없고 충돌이 없는 세상이 가능한가. 아니, 그런 세상이 과연 아름다운가.

 

글을 쓰고 나면 많은 의견을 듣는다. 쉽다, 어렵다, 친절하다, 복잡하다, 가볍다, 무겁다, 따뜻하다, 불편하다…. 쉽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저급한가 고심하고,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현학적인가 고심한다. 따뜻하다고 하면 너무 감상적인가 싶고, 불편하다고 하면 너무 독단적인가 싶다. 그런 평가들을 쫓아다니며 읽는 사람의 선호에 맞추려 하다 보면 결국 쌀로 밥 짓는 소리를 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미움받지는 않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소리.


글을 쓰다 한번씩 두려워질 때마다 나는 외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글은 결국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글이다.


거의 다 된 글을 훑어보다가 불현듯 직감할 때가 있다. 여기서 ‘스몰 토크’ 한 줄만 집어넣으면, 이 글은 적어도 미움받진 않는다는 걸. 하지만 그 한 줄을 기어이 뺀다. 읽는 이의 비위를 맞추는 글은 결국 누구를 위한 글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은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소통은 소란 속에서 싹튼다. 교통 신호처럼 파란불 켜면 탁 건너가고 빨간불 켜면 딱 멈추는 일이 아니다. 싸우고 헤어지고 남겨지고 좌절하고 외로워하다가 그래서 다시 사랑하기로 할 때 소통은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미움은 어쩔 수 없이 미움으로 남는다. 나를 싫어했던 나의 동료처럼. 그를 바꾸려 하지 않았던 나처럼. 하지만 또 어떤 미움은 희한하게 꿈틀거리며 당신과 나 사이에 길을 낼 것이다. 당신과 나의 우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그래서 결코 섞여들 수는 없지만, 외로울 때 슬쩍 건너가볼 수 있는 길이 있는 건 나쁘지 않다고 느끼며. 당신과 나는 비밀스럽게 그 길을 오간다. 싸우고 헤어지고 남겨지고 좌절하고 외로워하다가 그래서 다시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처럼. 그 길은 누군가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길이지만, 결국 우리에겐 없으면 안 될 길이 된다. 그런 '길'이 되는 글을, 나는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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