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조절하는 글쓰기
요즘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있는 글귀.
겸손해지려 하지 마.
넌 그만큼 대단하지 않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뼈 때리는 명언’ 중 하나인데 출처는 알 수 없다. 랜선 저편의 고수들은 언제나 놀랍고, 통념을 뒤집는 사고는 어디서든 짜릿하다. 저 글귀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겸손’보다는 ‘대단’에 방점을 찍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겸손이 왜 없겠나. 문제는 비대한 자아다. 내가 나를 너무 ‘크게’ 생각하는 오류와 인간은 평생을 싸운다.
자기 자신을 거대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꼭 ‘나는 잘났다’는 식의 ‘높은’ 자아상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자아상이 높든 낮든 자아 자체는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풀 수 있다. 이를테면 극단적인 자책감(또는 죄책감)이 그렇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전후 사정 덮어놓고 ‘내 탓’이라며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 있다.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어. 나 때문에 걔가 그렇게 됐어. 나 때문에 불행해졌어. 나 때문에 망쳤어. 이런 태도는 얼핏 ‘대단한 자아’와는 거리가 먼 ‘소심(小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한 사건을, 사람을, 인생의 행과 불행을 ‘좌우했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그 자아는 비대하다.
“윤주 씨,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내가 한창 사람에 대한 부담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때, 한 현자(賢者)가 내게 해준 말이다. “그 사람이 저를 그렇게 의지하는데, 제가 그 사람을 모른 척하면 어떡해요.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해요.”에 대한 답이었다. 현자도 웃고 나도 웃었다. 뒤통수를 (아주 얄밉게 개운한 소리가 나는) 뿅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게. 왜 ‘나 따위’가 그를 ‘잘못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누군가가 정말 나로 인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나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수만 가지의 결이 한 사람을 구성하듯, 하나의 감정도 수만 가지의 결을 품고 있다. 내게 의지하던 그를 놓아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의 결도 단 하나가 아니었다. 그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 하지만 부담스러운 마음, 그 부담스러운 마음 자체가 미안한 마음이 모두 존재하고, 그 마음들은 모두 옳지만, 나는 지금에서야 그 마음들 속에 웅크린 자아가 어딘지 뒤틀려 있음을 들여다본다. 죄책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감정이지만, 어떤 관계에서 그것은 나와 타인을 동시에 옭아맨다. 내가 관계를 통제할 수 있으며, 그것이 관계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러우니 반복되는 악순환.
나는 모든 관계에서 ‘내가 (아무리 용써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아보면 그것이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시작이기도 했다. 나의 부피를 줄여 몸을 가볍게 했을 때, 내 힘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때, 진짜 상대방을 위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대단’하지 않아도 소중한 관계. 내가 당신을 돌보고, 당신이 나를 돌봐줄 때 우린 연결되지만, 그 끈은 상대의 존재를 쥐고 흔들 만큼 지배적일 수 없고, 지배해서도 안 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계에 크게 허덕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아는 자신과 타인의 거리를 왜곡하지 않는 정도의 크기인 듯했다.
비대한 자아는 많은 부분에서 삐걱거린다. 왜 저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지만 자아의 부피를 조금 줄이고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굳이 싫어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내 생각만큼)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내게 특별한 선의도, 악의도 없다. 그렇다고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자아는 특히나 비만하다고들 한다. 글쓰기도 물론. ‘나’에 몰두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가 나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도착함으로써 완결된다는 점에서, 자아의 체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독자와의 청량한 관계를 위해. ‘대단’하지 않아도 소중한 관계. 연결되지만, 상대를 쥐고 흔들 만큼 지배적일 수 없고, 지배해서도 안 되는 관계.
그러므로 독자와의 거리를 왜곡하지 않는 정도의 자아가 필요하다. 자아가 없는 글은 글이 아니다. 하지만 비만한 자아에 깔린 글은 (쓸 때나 읽을 때나) 부끄럽다. 그런 글을 자위행위에 비유하곤 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쁜 건 아니지만 남들 앞에서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