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주 Jan 15. 2022

글은 삶을 넘을 수 없다

엔딩 꼭지에 얽힌 일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 들어갈 원고를 다 넘기고 나자 편집자님은 나에게 '엔딩 꼭지'를 요청했다. 600매를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해도, '엔딩' 느낌이 나는 꼭지가 없다는 이유였다(...) '아오 왜여.. 나름대로 아 끝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대충 다 끝처럼 느껴진다구여..'와 같은 헛소리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썼다. 당연히 엔딩에 실렸으며, 쓰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쓰는 삶에 관해 이렇게(!) 많은 말들을 내뱉고야 말았지만, 한 권 아니라 백 권을 떠들어도, 글은 삶을 앞서지 못한다고 썼다. 그걸 '글쓰기' 책 마지막에 쓰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요사이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괜히 여기에 옮겨본다. 물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략)

올 들어, 태어나 가장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한 친구에게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내가 해준 말이라고는 “계속 기도할게”뿐이었다. 단 한순간도 진심 아니었던 적 없지만, 할 때마다 무력해지던 말.


그 무력한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이 생략되어 있었다. ‘나는 너의 고통을 나누어 갖고 싶고, 그럴 수 없다면 네가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옆에 있고 싶으며, 옆에 있는 나를 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면 좋겠는데, 지금 너에게 그조차 번거로운 일이라면, 그저 나는 계속 기도를 하겠다.’ 하지만 나는 늘 마지막 말만 했다.


몇 번이고, 그에게 말이 아닌 글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글이 편한 상태로 살아왔으니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마음에 꾹꾹 쌓여 있는 공감과 응원의 소리를. 하지만 쓰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의 어떤 부분은 글 ‘따위’가 부연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조금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때가 있다면 글은 마음을 윤색할 때가 있다. 윤색이 나쁜 게 아니라도, 어쨌든 그게 ‘마음’은 아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는 슬프기 때문에 두서가 없고 슬프기 때문에 정교한 단어를 고를  없는  자연스러운  같다. 기도한다는 말밖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자체가 최선일 때도 있다고, 나는 나를 설득한다. 아무 꾸밈도 받을  없는 ‘기도할게라는 한마디가, 무얼 기도할 건지 얼마나 기도할 건지 어떻게 기도할 건지가 촘촘히 담긴 구구절절보다 강하기를 바라면서. 글이든 말이든 그것이 ‘ 넘을 수는 없다고 믿으면서.

얼마  친구와 짧은 만남  함께 지하철역 쪽으로 걷는 동안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그날 역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말과, 마음을 윤색할까 두려운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신호가 바뀌는 줄도 몰랐던 나에게 친구는 먼저 파란불을 보고 “가자!”라고 말했다. 그가 살짝 붙든 손에 이끌려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 가보자. 나의 기도를 얼마나  전달할지 고민하는 삶보다, 그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쪽으로.


-<삶을 넘을 수는 없다> 일부,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북토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