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꼭지에 얽힌 일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 들어갈 원고를 다 넘기고 나자 편집자님은 나에게 '엔딩 꼭지'를 요청했다. 600매를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해도, '엔딩' 느낌이 나는 꼭지가 없다는 이유였다(...) '아오 왜여.. 나름대로 아 끝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대충 다 끝처럼 느껴진다구여..'와 같은 헛소리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썼다. 당연히 엔딩에 실렸으며, 쓰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쓰는 삶에 관해 이렇게(!) 많은 말들을 내뱉고야 말았지만, 한 권 아니라 백 권을 떠들어도, 글은 삶을 앞서지 못한다고 썼다. 그걸 '글쓰기' 책 마지막에 쓰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요사이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괜히 여기에 옮겨본다. 물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략)
올 들어, 태어나 가장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한 친구에게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내가 해준 말이라고는 “계속 기도할게”뿐이었다. 단 한순간도 진심 아니었던 적 없지만, 할 때마다 무력해지던 말.
그 무력한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이 생략되어 있었다. ‘나는 너의 고통을 나누어 갖고 싶고, 그럴 수 없다면 네가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옆에 있고 싶으며, 옆에 있는 나를 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면 좋겠는데, 지금 너에게 그조차 번거로운 일이라면, 그저 나는 계속 기도를 하겠다.’ 하지만 나는 늘 마지막 말만 했다.
몇 번이고, 그에게 말이 아닌 글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글이 편한 상태로 살아왔으니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마음에 꾹꾹 쌓여 있는 공감과 응원의 소리를. 하지만 쓰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의 어떤 부분은 글 ‘따위’가 부연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조금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때가 있다면 글은 마음을 윤색할 때가 있다. 윤색이 나쁜 게 아니라도, 어쨌든 그게 ‘마음’은 아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는 슬프기 때문에 두서가 없고 슬프기 때문에 정교한 단어를 고를 수 없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기도한다는 말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자체가 최선일 때도 있다고, 나는 나를 설득한다. 아무 꾸밈도 받을 수 없는 ‘기도할게’라는 한마디가, 무얼 기도할 건지 얼마나 기도할 건지 어떻게 기도할 건지가 촘촘히 담긴 구구절절보다 강하기를 바라면서. 글이든 말이든 그것이 ‘삶’을 넘을 수는 없다고 믿으면서.
얼마 전 친구와 짧은 만남 후 함께 지하철역 쪽으로 걷는 동안 큰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그날 역시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말과, 마음을 윤색할까 두려운 글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신호가 바뀌는 줄도 몰랐던 나에게 친구는 먼저 파란불을 보고 “가자!”라고 말했다. 그가 살짝 붙든 손에 이끌려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응, 가보자. 나의 기도를 얼마나 잘 전달할지 고민하는 삶보다, 그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삶 쪽으로.
-<삶을 넘을 수는 없다> 일부,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