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를 이렇게나 사랑해주다니,
하는 감각이 나에겐 있다.
확실히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
분명한 사랑 속에 있다는 믿음.
손에 꼽을 만한 장점이다.
팩트를 말하는 게 아니다.
팩트라니, 사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다만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을 때
나는 내 사랑이 상대의 (나에 대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고 직감하는 순간이 잦다.
그래서 고맙다고 느낀다. 툭하면.
습관이다.
모든 건 습관이다.
그렇게 감각하도록 단련된 근육 같은.
최초의 근육은 30년 전쯤.
엄마는 내게 말했었다.(당연히 기억 못하실 거다)
윤주야, 세상에
자식을 위해 죽지 못할 부모는 없어.
그 순간의 음성과 눈빛이 너무 생생하다.
정작 맥락은 어렴풋한데도.
물론 그 말이 맞지 않다는 건 자라면서 충분히 알게 되었지만
내가 그 순간 꼼짝없이 그걸 믿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눈빛과 음성은 사랑이다,라고.
그러니까 거듭
엄마가 그래서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린 내가, 온 몸과 마음의 근육으로 그것을
‘믿었다’는 것 자체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와 허약한 체력으로 늘 예민했고
그 곤두선 신경을 종종 딸들에게 풀곤 했다.(대개의 부모가 그렇듯이)
하지만 엄마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엄마가 나를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믿음은
마흔 먹은 지금까지도 내게 유효해서
이 수많은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을 붙든다.
누군가의 목숨 같은 사랑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는 것.
그걸 내가 인지했고 기억해왔다는 것.
그 관계에서 단련된 근육을, 다른 관계들의 결정적인 순간에도 적용하게 된 것.
‘(당신이) 나를 이렇게나 사랑해주다니’ 하는 놀라움을
인생의 여러 순간마다 여러 사람을 통해 느끼고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는 경험들.
인생은 두렵지 않은 적 없고
세상은 이해된 적 없지만
내게 사랑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감사로 연결하는 근육이 있다는 걸
다행히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잊지 않는 한 그러므로
ㅈ같은 일이 난무해도 나는 괜찮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