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이(스포츠카)'와의 소풍을 마치고 내 반려인간은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다시 여행자가 되어서 섬에서 살아가야지~’ 꿋꿋한 다짐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니 마을로 향하는 길이 전처럼 답답하지 않다.
여자를 에둘러 앉은 승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들 중 몇몇은 여자가 아는 얼굴이지만 그들이 여자를 알아봤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에서 그들과 제대로 눈을 맞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가서려고 하면 진작에 시선을 피했다.
'그런 딱딱한 얼굴에 다시는 마음이 베이지 말아야지.'
여자도 시선을 앞으로만 둔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승객들이 차례로 하차한다. 한껏 가뿐한 기분으로 여자가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린다. 내일이면 수리가 끝난 차를 찾아서 다시 이사할 집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걸음 뒤로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그물 안에 걸려든 것처럼 자신이 누군가에게 포위된 것을 알아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승객 중 한 명이 싹 바뀐 얼굴을 장착하고 여자에게 다가온다.
"여행 중이에요?"
"네." (다시 여행자가 되기로 했거든요.)
이번에는 환하게 웃으면서 넓게 펼친 그물을 가깝게 좁힌다.
"마을 안내해 드릴까요?"
'(아직은) 나도 주민인데...’
얼떨결에 여자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종착지인 창고까지 끌려간다. 이어 토산품이 진열된 창고에서 상품 설명이 시작되고...... 그물 안에서 여자는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할지 궁리한다. 순수한 주민에서 상냥한 가이드로, 그리고 판매에 열 올리는 상인까지 그의 노련한 '3단 변신'에 여자는 알고도 넋을 놓겠다.
'그물을 뜯고 나가야 하나, 그물까지도 사야 하나.'
마을에 들어와서 지금껏 이 집 저 집에서 구입한 토산품만 해도 수십만 원어치는 되었다. (그 방법이 주민들과 가까워지는 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죄송하지만 살 생각이 없어요."
"고사리? 오미자차? 하나라도 사게요! 나 오늘 마수도 못 했수다!"
목청을 높인 그는 뭐라도 팔기 전에는 여자를 창고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것은 아주 부드러운 공포. 그 순간, 뾰족한 것이 여자의 옆구리에 푹 들어온다. 칼인가? 여자는 뒤돌아보려 하고, 뒤에서는 말린 나물(고사리) 뭉치가 여자의 살을 스친다. 뒤이어 여자의 입으로 붉은빛 음료(오미자차)가 다가오는데. 사약인가? 식겁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다.
"살려주세요! 저 관광객 아니고 주민이라고요."
뒤로 젖힌 고개와 하늘을 향해 빌다 만 두 손으로 여자가 눈알을 굴리며 버스 안의 상황을 살핀다. 그러자 알록달록한 버스 손잡이가 최면의 추처럼 흔들리며 다시 자신을 꿈속으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잊었어? 이곳을 나오려면 고사리 한 봉지는 사야 해!'
깨어나려고 눕다시피 한 몸을 겨우 세우고 앉아 좌석에 등을 바싹 붙인 다음 여자는 다시금 주변을 훑는다. 꿈속에서 봤던 주민은 이미 하차했고 버스에 남은 승객은 자신뿐이다. 이것은 자신이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여자가 고민하는 사이 '띠디ㅡ' 정차한 버스에 막 오르던 승객이 여자에게 아는 체를 한다. 마을에서 늘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이다.
여자의 집에서 골목을 나오면 왼쪽으로 두 번째 집에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남자. 그는 자신을 'OO이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의 곁에는 어린 딸아이와 수줍음 많은 부인이 있었다. 그는 마당에서 자주 딸과 놀아주다가 여자를 발견하면 언제나 '먼저'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어왔다. (그런 경우가 희귀해서 매번 신기했다.)
어느 날 산책길에 만난 그는 제 아버지와 고향이 죽도록 싫어서 젊은 날에 마을을 떠났었다고 여자에게 털어놨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고향에 돌아오니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웃들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방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부디 마을의 좋은 점을 봐 달라며 그는 여자의 가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또 응원했다.
고사리와 오미자차 때문에 비록 (꿈속에서) 암살당할 뻔했지만 희미한 미소와 미지근한 안부 하나로 숨 막히는 마을살이를 버티게 해 준 이들이 분명 존재했었다. 토산품팔이도, OO이 아빠도...... 모두 같은 주민이었지만 그들은 마귀와 천사의 옷을 달리 걸치고 여자의 인생에 나타난 각기 다른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나에게 무엇이었나.'
여자는 불현듯 지금 한창 이별 중인 남자가 떠올랐다. 둘이 함께한 순간들이 아닌 오직 남자의 인생 자체만을, 여자가 '알고 있고, 알 것 같은' 것들을 모조리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남자는 지금의 마을을 능가하는 역사의 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왕릉이 동네 꼬마들의 미끄럼틀이 되고, 이웃의 밥숟가락 개수를 아는 건 당연했다. 남자와 비슷한 연배인 여자에게는 생소한 부뚜막, 가마솥밥, 지게, 고무신, 우물 등이 남자의 기억 속에는 있었다. 학교가 멀어서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논길을 오래 걷는 일은 일상이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고 혼자 남은 남자는 읍내에 있는 찻집에서 음악과 철학책을 친구로 삼았다. TV에서 유행할 스타일을 예견한 것처럼 독특한 옷을 입고 시골길을 당차게 활보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너머의 세계를 믿고 꿈꿨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40대에는 자유의 몸이 되는 꿈, 남들과는 '다른 중년'을 살겠다는 계획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대학을 다니는 중에 결혼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 아내의 집안에 위기가 닥쳤다. 덩달아 부부 관계가 흔들렸다. 이혼을 했다. 아이는 남자의 몫이었다. 20대 초반에 학업, 결혼, 출산, 이혼을 한 번에 겪은 후 남자가 가야 할 길은 저절로 정해졌다. 아들의 양육을 위한 고정 수입과 가족들이 손을 내밀 때 '장남 찬스'가 되어줄 목돈을 비축해야 했다.
동네 마트에서 점장으로 근무하며 한 달에 하루를 쉬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12시간 동안 일하다가 휴무 전날이 오면 잠을 포기하고 다음 날 새벽에 차를 몰고 나갔다. 일터와 집을 벗어난 곳을 종일 여행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쪽잠을 자고 그 상태로 다시 출근을 했다. 그곳에서 14년을 일했다. 아이는 큰 탈 없이 자라주었고, 집안의 위기도 남자의 주머니 덕분에 그때그때 넘어갔다.
이후에도 남자는 사는 곳과 직장을 옮기며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보니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병중에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며, 아들은 아빠의 겨드랑이만큼 키가 자라 있었다. 그때서야 장남, 아빠, 형으로 사느라 기력이 다해 오그라진 자신이 보였다.
남자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섬으로 왔다. 책임감에 짓눌린 청춘이 지나고 이제는 '꿈꾸던 중년'을 준비할 때였다. 1년 동안 식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자신에게 돈 얘기를 꺼내면 죽어버릴 거라는 엄포와 연락하기 전까지 자신을 절대 찾지 말라는 당부를 못박았다. 그 무렵 친구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섬에 와서 숨 돌릴 곳을 신들린 사람처럼 파헤치고 다녔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인적이 없는 곳을 뚫고 들어가서 오직 자신만의 아지트를 짓고 비밀의 세계를 누렸다. 그사이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남자는 섬에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지 20년이 지나고 마침내 자신이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는 식구들에게 큰돈을 내놓지 않아도 되었고, 책임감을 내려놓는 일이 아직은 시늉이라 할지라도 전보다는 미안함이 덜했다.
'내가 꿈을 이루었네.'
젊은 날의 계획대로 이른 나이에 결혼과 양육을 마치고 보니 자신에게 돌아온 건 밥만 먹어도 행복해도 되는 자유였다. '이혼과 한부모 가정'은 애초의 계획에 없었으나 지나간 일에 부러 뜻을 두지 않았다.
'이대로만 흘러라.......'
남자는 연애와 결혼에 메이고 이혼에 상처받으면서 육아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삶을 다시 바라지 않았다. 무르고 예민하기만 한 자신에게는 누군가와 '관계'하는 일이 유독 힘겨웠다. '너무'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너무 가까운 가족, 너무 깊은 연애, 너무 많은 기대는...... '독'이었다.
남자는 최대한 감정을 아꼈다. 그래야만 과거의 지옥을 떨치고, 지금 이 마을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감정을 과하게 쓴다는 건 결국 자신의 목을 졸라 죽이는 일과 다름없으므로. 고루한 풍습과 배타적인 태도에 반응하지 않았고, 타격 받는 것에 무감각했다. 섬생활을 단조롭게 이어가기 위해서 남자는 감정의 결을 한가닥으로 묶었다.
지금 어디야? 슈퍼 태풍이 오고 있대!
역대급 태풍에 섬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지붕을 날려버릴 정도의 강풍이 예보되자 마을에서는 연일 지붕 결박 작업이 이어졌다. 여자는 읍내로 차를 몰고 나갔다가 순식간에 폭우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들기도 전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뒤바뀌었는지 바닷물이 한꺼번에 하늘로 쏟아지는 놀라운 풍광이었다.
"일하는 중이야. 오늘은 공방에서 잘게."
섬생활 6년째인 여자에게도 태풍은 여름이면 으레 며칠 묵고 가는 손님 정도로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슈퍼' 태풍이라고~"
오늘따라 지붕이 헐렁해 보인다. 풍채(차양)를 고정한 막대기가 바람에 밀려 덜컹거리자 큰 개가 기겁을 하고 몸을 숨긴다. 자동차 앞유리에 떨어지는 빗물의 양을 와이퍼가 감당하지 못해 방금 전 외출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여자의 하소연에도 남자는 흔들림이 없다.
"별일 없을 거야. 집에 가만히 있어."
'......'
남자는 슈퍼 태풍을 목전에 두고도 가랑비 내리는 날 정도로 여긴다.
'이 남자에게 나는 무엇인가......'
여자는 개들을 끌어안고 벌벌 떨다가 회오리에 빨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자신의 미래를 보다가
'나에게 이 남자는 무엇일까......'
슈퍼 태풍에게 '다 데려가세요, 관심없어요~',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귀를 막았다.
남자의 예언대로 슈퍼 태풍은 정말로 마을에 '별일'을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땅에 계절이 바뀌고 겨울 볕이 내리던 날. 여자는 남자와의 이별을 묵묵히 이어갔다. 아무렴, 그때까지도 아직은 자신보다 남자의 영혼이 더욱 아슬아슬하다고 느꼈다.
매일 지나는 길에 가본 적 없는 골목으로 남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좁은 길 끝에 다다르자 처음 보는 연못이 나왔다. 출렁이는 파도 대신 잔잔한 물결을 곁에 두고 둘이서 걷는데 발 앞으로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고양이가 별안간 남자를 향해 몸을 뒤집고 까무러쳤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야단스럽고 잔잔했던...... 애정과 무관심 사이에 당신이 보여요. 이별을 잘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네요. 한 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인가요, 바보 같은 당신을 어떡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