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보이지 않는 흙탕물 같은 시절

[호구] 1부 5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이 이야기는 내가 무지개다리까지 가져갈 내 반려인간의 첫 호구 연애사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인간이 오늘밤 저승에서 분기탱천하여 개집 문을 두드릴지도 모르겠다. 바보 같은 연애로 고통받고 있는 여느 집 다른 반려인간들에게 어쩌면 개껌 만한 위로가 될지도 몰라서 망자의 존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낸다.






20대. 여자는 서울의 고시원에서 일했다. 대학 생활은 자신과 맞지 않았고, 삶의 의미를 졸업에 두지 않았다. 인생을 숙고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최소한의 잠잘 곳과 생활비가 필요했다.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고시원 총무 일을 시작했다. 잠잘 방이 제공되었고, 공용 주방에는 밥과 김치와 계란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월급으로 40만 원을 받았다.



바닥에 누우면 방문이 닫히지 않는 아주 작은 방이었지만 주간 총무일을 마치고 이후에 누리는 시간들이 알차서 오히려 하루하루가 분에 넘치는 생활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주방. 샤워실. 계단 같은 공용 공간을 청소하고, 낮에는 방 청소와 입퇴실 관리 등의 업무를 보다가 오후에는 야간총무와 교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주로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공공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야간총무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자였다. 행동이 느리고 말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세상사에 불만이 많은 인간 같았다. 그러다가 얼굴을 마주하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꽤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그저 삶의 어느 때를 묵묵히 견디는 중이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둘은 혈혈단신 타지생활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남자는 자신이 정한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는데 마치 경찰이 되기 전에는 경찰이 되는 짓만 하겠다고 결심한 사람 같았다. 여자는 남자가 어려워하는 영어 공부를 도왔고, 체력장 시험을 위해 경기장 트랙을 함께 달렸다.






시험에 불합격하고 남자는 경기도의 다른 고시원으로 숨었다. 남자의 고시원에서 지하철 역으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여자도 일자리를 옮겼다. 다음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할 거라고 풀이 죽은 남자를 응원했다.



여자는 근무를 마치고 밖에서 시간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남자가 일하는 고시원으로 갔다. 전처럼 같은 고시원에서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전과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아침에는 수다를, 낮에는 영어공부를, 밤에는 경기장 트랙을, 하루가 동그란 생활계획표처럼 정직하게 돌았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여자는 40만 원 중 10만 원어치의 장을 봤다. 그날은 신기하게도 자전거 바구니에 먹을 것을 가득 싣고도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페달이 돌았다. 남자의 숙소에 먹을 것을 채우고 나면 여자는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자를 챙겼다. 타박인 줄 알고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뼈 때리는 조언이 되고, 무심한 행동은 살뜰한 관심이 되어 여자를 보살폈다.






둘 다 지쳐서 마음이 약해지는 날에는 남자의 숙소에서 함께 장난을 쳤다. 말장난을 하다가 몸장난으로 번지면 남자는 여자의 몸을 타고 올라와서 침대 위에서 무겁게 꿈틀댔다. 아래에 깔린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면 남자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서서히 몸에서 힘을 뺐다. 남자는 경찰이 되기 전에는 목숨을 걸고 경찰이 되는 짓만 해야만 했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흙탕물 같은 시절이 서로에게 정화 장치가 되어서 지금 당장의 마실 물이 되어주는 사이였다. 인간이 인간을 아끼는 마음 하나로 너절한 현실이 빛날 수 있는 시절이 지나고 있었다.



두 번째 경찰 시험에 남자는 합격했다. 발령지인 부산으로 남자는 떠났고, 여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에 세상은 하루하루 줌아웃이 되어 대궐 같았던 고시원 방이 우주의 먼지가 되고,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득해져 갔다.






여자는 짐을 싸서 충청도의 시골로 갔다. 공장 일을 마치고 논길을 걷고 있는데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떠난 동네에서 아직 살고 있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어 남자는 여자를 나무라는 말투로 혼자 남은 여자를 걱정했다. 그것이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에 빈 공간을 감지했다. 마지막을 각오하고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잘 지내."



"......"



남자의 침묵이 '여기까지'라고 알렸다. 둘은 사귀었지만 연인은 아니었고, 연인은 아니었지만 사랑을 했었다. 서로를 건너는 다리가 기울어진 시소처럼 물속에 잠겼고 여자는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당신도 공무원 수험생 할걸. 시험에 합격해서 당신이 먼저 남자를 떠날걸. 고시원 방쪼가리만 한 월급으로 마트를 털 때 얼마나 행복했어요. 자전거 바구니에 먹을 것을 싣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고요. 밤거리를 질주할 때 그놈 먹일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헤어질 걸 그리 잘해 주었네요, 다시는 못 볼 걸 그리 즐거웠네요. 이런 반려인간 또 없습니다. 내 반려인간이 당신이라는 게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늘을 첨벙거리며 날아간 J






*[호구]는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작가의 새 글은 <구독&좋아요&댓글> '3종 세트'로 태어납니다. :)

이전 04화한 인간을 끝까지 아꼈던 진심과 함께 이겨낸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