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을 끝까지 아꼈던 진심과 함께 이겨낸 시절

[호구] 1부 4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비행기가 착륙하고 짐을 찾은 나의 반려인간 서둘러 공항 밖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놓친 인간 케이지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다.



"미안. 거의 다 왔어."



막차 버스가 오려면 앞으로 1시간. 공항에서 시작해서 공항으로 끝날 하루가 되려나. 눈앞에는 이층집 키 만한 거인들이 손바닥을 쫙 벌리고 단체로 펄럭이데. 환영인지 박대인지 모를 순간에 인간은 시 지난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상환한 빚이 80프로를 넘었다. 빚청산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들떴고, 남자는 다른 인간이 되어 갔다. 남자는 현실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수록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격일제 근무만 5년째, 호텔 프런트에서 하루에 24시간씩 일해서 돈을 벌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종일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기계처럼 받다가 새벽 1시가 되면 좁은 방에서 3시간가량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 객실에 막 쓰고 던져 놓은 수건 모양을 하고 온몸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퇴근을 했다.



불륜과 자살 소동은 주말마다 끊이지 않았고 호텔 주차장에 있는 경찰차와 과학수사대 차량을 보아도 어느 순간 놀라지 않았다. 어느 날 휴가를 나온 군인이 객실 창문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번개탄을 피워서 자살 시도를 했다. 처참한 현장을 보고도 무감각했다. 도심의 소란에 미치지 않으려고 자신도 반은 미쳐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고지가 바로 앞이야.'



빚이 해결되면 팍팍한 생활도 나아지고 해 본 적 없는 여유도 누리게 될 참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고통의 끝을 생각할 때 남자는 여자와의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자기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느니, 자기가 헤어져 주는 게 여자를 위하는 일이라느니...... 이런 종류의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 즘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가족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그러더라. 바보 같이 그 빚을 왜 갚았냐고."



남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여자는 귓구멍에 뭐가 잘못 박힌 줄 알았다.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고?"



남자의 이름으로 개인회생을 준비하면서 국세는 탕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남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명의로 대출을 받아서 사업장을 늘이는 동안 부가세 신고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장사를 하면서 세금을 피하다니, 아버지는 '파산'을 고려했던 것일까. 한창인 아들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고(남자가 자주 하는 표현이었다)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빚을 왜 갚았냐니.






훗날 남자의 부모로부터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바란 게 아니었다.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여자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두 사람의 지난 시간들을 삽시간에 '삽질'로 만들었다. 남자는 언제 가족을 미워했냐는 듯 마음을 열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씩 잠잘 때마다 천장에서 떨어진 남자의 증오가 여자에게까지 번진지도 모른 채로.



"넌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해."



'(네가 하면 되잖아, 그 좋은 놈.)'



"너를 위해서 헤어져 줄게."



'(난 헤어지기 싫다고.)'



도망치는 남자의 추잡한 변명이라는 것을 모르고, 여자는 잠시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가자고 남자에게 제안했다. 며칠 만이라도 살던 동네를 떠나 지금의 상황을 멀리서 보면 병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타게 남자를 설득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여자는 미래를, 남자는 여전히 이별을 꿈꾸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자는 이혼 못해서 '환장'한 놈로 변했다.






쩌면 남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일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평생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여자는 평생 남자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자는 두 번의 이혼 확인기일 중 한 번만 출석하면 된다는 사실조차 잊고(첫 번째 기일에 이미 출석을 마쳤다) 근무 중인 여자에게 전화를 해댔다. 그리고 왜 법원에 나타나지 않았냐며 윽박을 질렀다. 자는 끝까지 죽을힘을 다한 진심이 처음으로 능멸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성사된 이혼.



남자는 앞으로 남은 빚을 혼자 갚아야 하니 빡빡한 형편에 자신이 개를 키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함께 살던 아파트에 혼자 남을 자신이 없어서 여자는 자신이 살고 싶은 섬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당장 개와 함께 지내려면 일과 집이 필요했으므로 여자가 먼저 섬에 가서 직장을 구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자는 남자에게 섬에 내려와서 쉬어보는 게 어떻겠냐며 매달렸다.






남자는 섬에 오지 않았고 여자의 부탁으로 필요한 짐들을 택배로 부쳤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여자는 퇴근 후 강아지와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남은 건 신용카드 빚과, 가진 돈 200만 원. 한 칸짜리 방을 겨우 구했다. 현실은 뾰족한데 눈에 덮인 둥글둥글한 풍경이 마음을 다독였다. 섬의 사계절이 보고 싶어졌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강아지를 섬으로 데려오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버리지 않으려다가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도 모르고 남자와 어떻게 인사를 할지 깜깜한 공항버스 안에서 내내 고민하다가 강아지와 단 둘이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김포행 탑승을 기다리는 곳에서 남자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 밤.

마주하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한 인간을 끝까지 아꼈던 진심과 함께 이겨낸 시절이 한꺼번에 잘려나갔다. 이제야 여자는 남자가 놓아졌다.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고 나서야 상대가 덩어리째 버려졌다. 이렇게 멍청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자책을 하다가 컴컴한 집에 혼자 있을 개가 떠올랐다. 아직은 아니라고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눈 안에 가두었다.



개에게 가는 길. 기내 안에서 밤하늘을 내려다보다가 지난 연애들이 시간을 거슬러 하나, 둘 떠올랐다.



'나 참 한결같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자신에게 웃음이 터졌다. 개와 함께 섬에 들어온 날, 여자가 말했다.


" 지난 호구 연애사를 너한테만 들려줄게."




나의 반려인간에게.


울다가 웃다가 미친 거예요? 정신줄 잡아요. 진심? 사랑? 요즘 세상에 그딴 걸 누가 알아줘요! 뭐라고요? 이번뿐이 아니라고요? 당신이 바보인지 멍청이인지는 더 들어줄 수 있는데 오늘 안에는 새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새 길을 주고 떠나간 W






*[호구]는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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