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풍선처럼 터뜨릴 수 있는 시간

[호구] 1부 3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연애사

by 조해야 Johaeya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폰을 부서질 듯 움켜쥔 여자가 확인한 메시지를 보고, 또 본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남자와 여자 인간 둘을 뜻하는 건지, 개까지 포함인 건지 궁금해진 여자가 남자에게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참는다. 케이지 안에 갇힌 지 2시간째. 공항의 인파와 소음으로 답답해서 죽을 지경인데 여자는 나를 케이지 밖으로 꺼낼 생각이 없다. 새벽녘 집에서 출발한 시간까지 합하면 정확히 3시간째, 공항에 도착해서 잠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산책할 기분도 지 않았다.



내 생애 첫 반려인간(남자)은 떠났고, 오늘 새벽에 여자와 나는 아파트를 나왔다.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케이지 그물망에 얼굴을 밀어붙이자 찌그러진 입과 뒤틀린 눈썹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처음 듣는 벌레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머리 위에서 빗물처럼 떨어진다. 들리는 건 소리인데 내 귀에 닿는 건 왜 액체 같은지를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야 알았다.



'버려진 처자식 꼴이잖아.'



폐허가 된 결혼과 그곳에 남은 생명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얼굴. 마음껏 축복받고 사랑하던 날들이 으깨진 케이크처럼 완전히 망가졌다. 여자는 남편을 잃었고, 나는 아빠 없는 개가 되었다. 반려인간의 '이혼'으로 나는 앞으로 한부모 가정의 댕댕이로서 남은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케이지 그물망 앞으로 하늘하늘, 바람을 일으키는 손바닥 하나가 나타난다. 우리가 붙어 있다, 는 여자의 신호다.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두 번째 안내 방송이 나오자 손바닥이 바닥으로 축 늘어진다. 그리고 속절없는 혼잣말이 그물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반려인간의 이야기...... 나는 헐떡거리던 입을 다물고 케이지 안에 가만히 엎드린다.






여자는 난폭한 형제의 폭력을 피해서, 남자는 아버지와의 다툼을 피해서 고향을 났다. 시골의 한 직장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남자는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여자는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빈털터리인 것은 서로 마찬가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서 자신이 누군가와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딱 하루치의 공기가 되어 살아졌다.



엽쁘(여보).



사귈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이렇게 불렀다. 두 눈을 깜빡이며 동시에 쁘! 하고 입술을 벌릴 때에는 자신이 여자에게 가할 수 있는 오만가지 귀여움을 물방울 총처럼 쏘았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물방울이 여자의 몸에 닿아서 터수록 티끌 만한 마음이 점점 거품을 입고 자라났다.



데이트가 반복되고 동거로 이어졌다. 동거를 시작한 어느 날 남자가 상의도 없이 생후 4개월 된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식구가 늘면서 집안의 살림도 따라 늘었고, 살림 장만의 기쁨 못지않게 방바닥을 구르는 작은 구슬들처럼 작은 집에서 이 부대끼는 오밀조밀한 행복을 누렸다.






느 날. 남자의 명의로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빚이 남자의 아버지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도, 당장 두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앞으로 고생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알면서도 여자는 전과 같이 남자를 대했다. 평생 본 적 없는 그 돈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를 알지 못했고 사태가 벌어진 것이 남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걸려도 결국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다(이것이 '용기'가 아니라 '무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쩌면 가족의 불신으로 절망에 빠진 남자에게서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았는지도 몰랐다. 남보다 더 악랄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이 '가족'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나지지 않는 참혹이었다. 여자는 참혹에 빠진 인간을 버리지 말자고 맹세했다. 그리고 헤쳐나갈 수 있다고 남자를 설득했다.



"같이 해결하자."






죽도록 일만 했다. 빚은 티 나지 않게 줄었지만 어쨌든 줄고 있다는 사실로 하루씩 살아졌다. 남자의 신용 문제로 여자가 대신해서 휴대폰, 신용카드, 집, 자동차를 마련했다. '이름(명의)'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삶이 절름거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안쓰럽고 놀라웠다.



방 안에 엎드려서 둘이 수다를 떨던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는 여자에게 혹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법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남편, 이라는 말에 여자는 이상하게 기분이 뜨끈해졌다. 이후로 자주,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 오르다가 '키울' 생각에 곧장 꺾였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아들의 뒤통수를 친(그렇게 표현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기도 그런 부모가 될까 봐 무섭다고 말했다. 여자는 남자를 달래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각했다.



한편 남자는 소소한 순간을 바꾸는 솜씨가 있었다. 요리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강아지와 노는 흔해 빠진 일상을 자신만의 온기로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빈틈없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빚만 해결하면 지금보다 굳건한 가족이 될 거라고,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찾아온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그날에도 둘이 함께일 거라고 굳건하게 믿었다.






비행기가 섬에 착륙하고 믿음들이 하나 둘 활주로 아래로 떨어진다.



'참혹에 빠진 날들......'



어떤 시간은 지금보다 일찍 물풍선처럼 터뜨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6년이 걸렸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펫샵을 지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샵으로 들어온 남자가 샵주인에게 나를 데려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사정했어요. 샵주인은 오만 원에 나를 데려가라고 했고, 남자는 들뜬 마음으로 당신이 있는 집으로 나를 데려갔어요. 그렇게 우리 셋은 만났죠. 코딱지 만한 집에서 행복의 크기는 정반대였어요. 동네 공원에서 낙엽 밟던 날 기억나요? 남자는 내게 '단풍 구경 갈까?'라는 말 대신 '라바라바 하러 갈까?'라고 말했었죠. 나는 그 말이 이제 싫어요. 라바라바, 낙엽을 밟는 경쾌한 소리가 아니라 밟혀 흩어진 모양 같잖아요. 꼭 지금의 우리 셋처럼.
참혹을 터뜨리고 만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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