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지..
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대통령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러나 졸업도 하기 전에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와버렸고, 어린 마음에 상심한 나는 꿈을 접어버렸다. 아직 그 기록이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꿈을 접은 후로 다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일하느라 바빠 등한시했던 브런치를 갑자기 찾아와서는, 대통령이 꿈이었다고 말하고 있네. 게다가 근무시간에. 그러나 글은 생각났을 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까먹으니. 사실, 예전의 내가 그 꿈을 꾼 이유가 꽤나 어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표면적인 이유는 '아무도 없어서'였다. 대통령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혹은 대통령 뽑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둘 다 아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주변 내 또래 친구들 중 대통령의 꿈을 꾸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였다. 한 친구는 희망 직업란에 공무원을 적었고, 다른 한 친구는 주부를 적었다. 공부 좀 한다 치던 친구는 변호사를 적었고, 춤 좀 춘다 하던 친구는 안무가를 적었다. 모두 대단한 직업이다. 되기도 힘들고 하기도 힘든 그런 일들이다. 다만 내 눈에는, 모두 이 정도는 되겠지 싶은 직업을 적는 듯했다. 초등학교 때는 분명 과학자나 우주비행사, 대통령 같은 것들이 눈에 보였던 것 같은데. 타협이 싫었다. 물론 지금도 싫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막 나가는 세계 최악의 청개구리였기에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 직업을 선택했다. '대통령'을 적고 내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는 친구, 선생님, 부모님에게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그러다 혼이 나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한 번 잠에 빠져들면 다음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숙면을 하곤 했는데, 엄했던 선생님 수업시간에도 그랬다. 영어 시간이었다. 맨 앞자리였나 둘째 줄이었나 대범하게 고개를 떨구고 자고 있었다. 그걸 보셨던 선생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웠고, 그렇게 자다가 대체 뭐 될래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또 대범하게, 잠이 덜 깬 상태로 "대통령이요.."라고 답했다. 그때부터 수업이 정지되었다. 내가 한심해 보였는지 설교시간이 시작되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기가 차다는 듯 비웃기도 하셨고, 응원하는 듯 독려하는 듯 앞으로 대통령이 되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하셨다. 사실 그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이 덜 깬 상태라..
어쨌든 그렇게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꾸역꾸역 지켜온 내 꿈이었다. 그리고 그 수식어 '한국 최초의 여자'를 목표로 삼은 이유도 있었다. 내가 60대가 될 즈음, 그러니까 2060년대가 되면 그 어떤 수식어 없이 여성이 대통령 자리에 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예전 대통령의 딸이라서 혹은 핏줄이 어쩌고 집안 계통이 어쩌고가 아니라 그저 서울시장 출신, 검찰총장 출신 이런 수식어를 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맨몸으로 후보에 출마해도 지금 후보로 나오는 남정네들과 견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게 2010년대의 내가 바라던 2060년대의 모습이었다.
어제 UN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뭔 얘기를 했나 보다. 받아보는 뉴스레터에서 요약해 알려준 걸 보고 알았다. 구글링을 해보니 이런 글이 나오더라.
Yet, women are still underrepresented in public life and decision-making, as revealed in the UN Secretary-General’s recent report. Women are Heads of State or Government in 22 countries, and only 24.9 per cent of national parliamentarians are women. At the current rate of progress, gender equality among Heads of Government will take another 130 years.
현재와 같은 여성 리더 진출 상황으로 봤을 때, 윗대가리 자리의 성평등을 이루려면 130년이 걸릴 것이라고. -유엔 보고서 링크도 첨부했으니 궁금하신 분 보세요.
고등학생의 나는 2060년대의 여성대통령을 기대했건만, 내가 너무 낙천적이었나 보다. 2150년대라니요. 나는 죽었겠구나.. 앞서 말했듯, 아직까지 대통령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별개로 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소식이다.
뭣도 모르는 한 고등학생의 발상보다 발전이 더딘 현실에 조금은 서운하기도 하다. 당연한 걸까? 고등학생은 희망을 갖고 사니까. 지금은 희망 잃고 시간 잃고 체력도 잃어가는 어른이 되었다. 다 잃었지만 그래도 노력을 해볼까 한다. 노력이라고 해서 여성 대통령이 되어야지.. 아니다. 내 자리에서 내 일을 잃지 않고, 사회의 지분에서 내 몫만 악착같이 지킨다면 그것이 1%든 0.00001%든 저 숫자놀이로 판단하는 성평등에 도움이 되겠지. 나뿐만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여성들에게 (랜선)장미 한 송이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