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엄마 아빠는 육아와 교육때문에 고민한다.
■ '아이에게 스마트폰대신 부모와 대화하기'
서로 귀찮기도 하고, 막상하려면 쉽지 않다.
코로나 시절 이후로 아이들이 테블릿으로 학습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자주 오가는 대화는 “이걸 계속 하게해도 되는 거야?”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이것’은 테블릿을 이용한 게임과 AI 학습툴 기능 사용에 관해 얼마나 허용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아내는 말한다.
“매일 틈만나면 게임을하고 아직 절제력도 없는데 알고리즘에 연결되어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준비가 안된 정보에까지 노출되는 것은 안되.”
나도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고 AI 툴과 검색기능 활용을 위해서는 스마트 폰을 비롯한 장비에 대해서 일찍 친숙해져야 한다는 의견이지만 한편으로는 절제력없이 중독되거나, 무분별하게 알고리즘에 노출되는 것에는 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결국 AI 툴은 영어권에서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어학 공부의 필요성에도 동의하기에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도 보내고 미국 연수에도 같이 가며 미래역량 함양차원에서 나름의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부모도 알아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신념으로 AI 기반 툴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나는 아내의 주의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챗GPT 같은 생성형 AI툴을 아이들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법만 갖춰진다면 빠를 수록 좋다는 의견이다. 즉, AI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고, 다만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의존하게 될까봐 걱정되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계속하게 된다.
“얘가 지금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검색을 통해 본인의 주관은 배제하고 대신 생각해 주는 걸 받아 적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AI시대 미래역량에 대해 고민하면서 세 아이의 아빠이자, 철학 전공자로서 생각을 정리하고자 글을 쓰고 나 스스로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생각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아이들이 질문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에게도 AI를 이용한 검색을 장려하지만 한편으론 검색을 하기 전에 한가지 과정을 거치려고 노력한다.
“먼저, 네 생각은 어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먼저 이야기 해보고 아빠랑 같이 기술을 사용 해 보자.”
시대변화와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관련된 이 질문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논쟁이자 변화에 적응해가는 인류 역사의 반복이다.
기원 수백년 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 이는 게으름이나 우연이 아니라, 철저한 선택이었다. 그는 문자를 불신했다. 정확히 말하면, 문자가 인간의 사고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가 보기에 글은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글은 질문을 받지 않는다.
둘째, 글은 이해의 (전달자의 의도와 다른)환상을 만든다.
셋째, 글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전달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앎이란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상대와 부딪히며 끊임없이 점검되고 깨닫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화를 통해 가르쳤고, 상대가 스스로 고뇌하고 생각하여 답을 낳게 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택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향의 아내는 아이가 정해진 답에 집착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정보가 전달되는 것에 주의한다.
“먼저 너의 생각은 어떠니?”
“주어지는 정보에만 얽메이지 말고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아이가 되었으면 해.”
아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교육 정석의 길을 걷고자 하고, 자칫 방만해 질 수 있는 스파트 폰 육아에 스스로를 다잡으며 아이가 탐구하는 법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문자와 글의 무익함을 사사받았음에도 글을 남겼다. 그것도 아주 많은 글을. 그리고 플라톤은 글을 쓰면서 글을 비판했다. 그는 문자를 ‘파르마콘’, 즉 약이자 독이라고 불렀다. 문자는 기억을 돕지만, 동시에 기억하려는 노력을 약화 시킨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플라톤이 문자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글이란 생각을 대신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게 하는 글을 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침서 형식의 정보 전달 목적의 글 대신 대화형식의 글을 썼다. 처음부터 정답을 주지 않고, 독자가 대화에 동화되어 질문과 생각하는 과정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형식이었다.
아빠린 내가 바라는 것은 어쩌면 플라톤과 닮아 있다. AI를 쓰되, 그걸로 아이를 더 많이 질문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걸로 생각을 더 확장하면 좋잖아.” 그 말에는 내 나름의 철학이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절제와 자제, 메타인지와 정보에 대한 리터러시도 함께하는 쉽지않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사는 유사한 구조로 반복뙬때가 많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는 학문과 종교, 법과 외교를 잇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래서 각 나라의 자국어 사용이 확산 되자 엘리트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하나의 언어로 일관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신학, 철학, 법학 같은 학문의 개념과 이론적 보편성이 무너질 것이라 했고, 표현의 정밀성이 사라질 것이라 했으며, 지식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지식이 퍼져 혼란을 낳을 것이라 우려했다.
이 논리는 낯설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한자 교육을 둘러싼 논쟁도 같았다.
“한자를 버리면 동음이의어 구분이 복잡해지고, 단어의 어원을 구분하지 못해 의미가 얕아진다.”
“동양 한자어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과거로 부터 한자로 이뤄진 한국 역사가 단절된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한 폐기도, 완전한 유지도 아니었다. 라틴어의 위상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체되었지만 아직도 유럽문화와 전문 영역에 남아있고, 한자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영향력과 명확한 의미의 전달을 위해서 언어도구로써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대중적이며, 더 편리한 언어(기술)로 대체될 수 있음은 증명되었다.
지금 우리가 생활 속 AI발전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생성형 LLM AI와 프롬프트를 둘러싼 논쟁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요령만 익히면 된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만 유리해진다.”
이 말들은 모두, 과거에 문자·라틴어·한자를 두고 했던 말들과 구조가 같다. 문제는 AI가 아니다. 문제는 사고를 외주화하려는 인간의 태도다. 소크라테스 엄마와 플라톤 아빠의 논쟁의 근본도 결국 인간(아이)를 위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사고가 얕아질까 봐,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될까 봐. 우리는 AI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막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받아들이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제시된 결과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편향과 오류를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
이건 기술 교육이 아니라, 철학 교육에 가깝다. 라틴어를 줄이되 수사학과 논리학을 가르쳤고, 한자를 줄이되 개념과 문맥을 서술했듯이, AI를 이용하는 아이 역시 통계와 정보가 본인의 사고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엄마와 플라톤 아빠는 다른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이가 빠른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질문을 하게 하고 싶다는 점에서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역사는 말해 준다. 인간을 편하게 하는 새로운 도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글도, 라틴어도, 한자도 그랬다.
AI와 프롬프트도 마찬가지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거부가 아니라, 비판적 수용이다. 생각을 대신하게 두지 않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어쩌면 간단하지만 너무나 쉽게 위태로워 질 수 있는 중요한 선택이 오늘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우리 부부에게 동시에 전해주려 했던 태도일지도 모른다.
■ TMI: 중국한자는 계속 살아 남을까?
A) YES... 그러나 다른형태로 남게될수도 있다.
중국에는 오래된 말이 하나 있다. 중국인은 평생 다 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중국 음식을 다 먹어 보지 못하고, 둘째, 중국 전역을 다 여행하지 못하며, 셋째, 중국의 글자를 다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중국 한자는 학술적으로 정리된 것만 해도 8만 5천 자가 넘는다. 그래서 중국 내부에서도 오래전부터 “이 문자가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반복 되어 왔다. 20세기 초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였던 루쉰은 임종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한자가 사라지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문자가 사고와 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인식이 담긴 말이었다. 중국은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간체자 정책을 시행했다. 글자를 단순화해 읽고 쓰기 장벽을 낮추자는 시도였다. 효과는 분명했다. 문맹률은 빠르게 낮아졌고, 문자는 더 많은 사람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또 다른 단절이 찾아왔다. 중국 내부에서는 이를 ‘2차 단절 이라고 부른다. 간체자는 읽을 수 있지만, 그 간체자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현상은 디지털 환경과 깊이 연결돼 있다. 중국에서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한자를 입력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글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알파벳 발음 기호만 누른다. ‘베이징(北京)’을 쓰려면 ‘bei jing’에서 b와 j만 입력하면 된다. 글자의 모양을 몰라도, 획순을 기억하지 못해도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글자를 쓴다는 행위가 사라지면서 글자를 이해한다는 감각도 함께 희미해진다. 읽을 수는 있지만 설명하지 못하고,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며, 복합 개념이 들어간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것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기기가 일상을 지배하며 언어 생활을 바꾸는 현상은 이미 전 세계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다만 중국은 그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실험실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 이 상황에서 택한 대응 방식이다. “디지털을 줄이자”거나 “AI를 막자”는 쪽이 아니다. 오히려 AI를 더 정교하게 쓰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최근 중국 교육계와 기술 분야에서는 AI를 ‘답을 주는 기계’가 아니라 ‘질문을 되돌려주는 장치’로 설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정답을 바로 보여주는 대신 왜 이 단어가 선택됐는지, 다른 표현은 무엇인지, 문장의 구조는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방식이다. 문제가 한자냐, 영어냐, AI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를 대신하게 두느냐, 사고를 자극하게 만드느냐의 문제라는 점이다. 인류의 정체성을 대신하는 언어 영역에 대한 파격적인 시도를하는 중국을 바라보며, 동시대 AI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도 더이상 남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 AI 시대 육아 한 줄 성찰
아이에게 AI를 쓰지 말라고 가르치지 말고, 비판적이고 주도적으로 AI를 쓸 줄 알게 가르치자.
여러분의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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