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유교정신에서 버리고 찾을 것-찾을 것
4-1. 유교정신에서 버리고, 찾을 것 – 찾을 것
- 유교문화가 망쳐버린 한국 교육문화 – 시험
- 유교정신을 잃어버린 한국 교육문화
* 예악(禮樂)과 공익(公益)
■ 유교정신을 잃어버린 한국 교육문화
– 예악(禮樂)과 공익(公益)
미국에서 2010년대부터 STEM에 대한 열풍으로
관련분야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교육내용과 방법에
변화가 있었는데 오늘 날 그 미국에서 STEM 교육에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사회성과 감수성 저하다.
그래서 ‘STEM’에 미적 영역(ART)을 포함하여
‘STEAM’으로 감수성과 미(美)적 감각을 키우고
협업능력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교에 이미 관계를 중시하는 예(禮)와
미적 감각을 중시하는 악(樂)의 전통이 있지만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예악’의 경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풍류를 즐길 줄 알고
세월이 흘러 K-POP을 유행시키고 있으나 정작 학교에서는
미적 감수성에 대한 교육을 등한시한다.
물론 개인적인 관심과 취향에 따라서 악기를 배우기는 하나
중학교 이후에는 입시교육에 밀려 예체능 수업은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는 실정이다.
가족들이 서로 악기를 다루며 서로 공감하고 화성을 만들어
내는 여유와 교감은 학교로 미루고 학교는 사회로 미루고
사회는 연예인에게 미룬다.
굳이 시대에 안 맞는 유교를 다룬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흔히들 ‘윤00 나이’ 라고 할 정도로 복잡한 나이체계를 바로
잡고자 만(萬)나이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나라가 떠들썩
할 정도로 유교문화는 우리 근간이자 현재에도 사회전반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유교의 기본 정신인 화합과 평화를 위해 중요시
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다.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의 근본원칙은 조선왕조를 6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조선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정립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성(誠)[21] 이라고
한다. 성(誠)은 진실, 참됨, 순수한 정성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에 있어 나에게 참되고 타인을 대하는 것에
진실되고 조직에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스러우면 그 관계는
올바르며 화합하고 평화롭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공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관계를 맺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보면 많은 것이 뒤틀려 있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에게 참되지 않다.
넷(network)상에서 타인에게 보여지는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어해 타인을 모방하려 하지만 그 타인조차 대부분이
허세와 연출로 비현실적인 모습을 꾸며낸다.
결국 모두가 무언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에 우울증이
오고 타인과 비교의 연속으로 삶이 괴롭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면, 비대면, 가상의 관계로
점점 다양화되고 자아가 분리되어 가고 있다. 만나는 수단,
방법, 공간에 따라 말투부터 태도 또는 정체성까지 변화하며
관계를 형성한다.
‘인스타그램’ 에서는 너무나도 외향적인(MBTI ‘I’에요!)
성격이지만, 실제로 만나면 낯을 가리고 말한마디 타인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지만 사회적인 문제, 공익을 해치는 것은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군 생활에서도 이제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병사와 간부들이
가장 많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사이버 범죄였다.
작게는(?) 중고거래 사기, 게임 채팅 방 욕설,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하거나, 불법 사이버 도박으로 벌금과 구속수사
받는 경우도 있었다. 드물게는 암호화 화폐 스캠(Scam)
범죄에 주요 관련자로 구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과연 이들은 범죄자 같은 외모와 특성,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 현실에서는 아니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의 또다른 자아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들도 현실의 자신이 네트워크 세상에서는
왜 다른 사람이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아무리 현실에서 바른 사람이고
네트워크 안에서만 그렇다고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다른 모습 또한 그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즘 과거의 행동과 발언으로 소위 ‘나락 가는’
연예인이나 SNS 인플루언서(influencer)를 종종
목격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네트워크의 기록은 더 이상
나와 따로 떨어진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흔적들이 아니다.
네트워크에서의 흔적은 지우기 어렵고, 지웠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복제, 유포하여 다시 퍼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와 발목을 잡게 된다.
그만큼 익명성에 대한 반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타인과의
관계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의를 갖지 않으면 나중에
비판과 비하를 피하기 어렵다.
결국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지만 세상이 발전할수록
자기 관리를 바르게 하고 공익을 추구하지 않으면
타인과의 관계를 넓히거나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민심은 지극히
예민하고 감정적이며 선동에 쉽게 휘둘린다.
특히, 어느 전쟁사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득권이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위해 사용했던 수단인
분할통치(segmentation policy)가 쉬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세대가 갈리고, 남녀가 갈리고, 지역이 갈리고 학벌이
갈린다. 이제는 소득이 갈리고 기술의 적응과 부적응
으로도 나뉜다. 서로 귀를 막고 시야를 가리고 화합보다는
어딘가 소속되었다는 순간의 안도감과 낮아진 자존감의
충족을 위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승리에 도취된다.
다가올 미래에는 다양한 매체와 조직에의 접근성을
이용하여 이런 분열과 선동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진실의 왜곡에서 벗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쉬울 수도 있다. 내게 물리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차단
(Disconnected)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느 길을 갈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자본주의와 기술에 나를
덮쳐오는 알고리즘의 권유에 원하는 것만 주는 대로
입력하고 보고싶은 것만 볼지, 한걸음 물러나 다양한 의견과
근거들을 종합하여 분석할 수 있을지는 지금부터 습관처럼
길러지는 능력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이 능력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어릴 때부터 부모의 관심과 모범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21]중용(中庸), 삼달덕(三達德)’과 ‘오달도(五達道)’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덕목이 하나있으니
‘성(誠)’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