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켐과 베버의 시선으로 본 〈핵소 고지〉와 〈킹덤 오브 헤븐〉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극단적인 혼돈의 형태다. 생사가 오가는 카오스 속에서 인간은 무엇에 기대어 이성을 붙들고 서로 연대하는가. 그리고 똑같이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어떤 경우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신념을 학살의 면허로 둔갑시키는가.
1. 살육의 고지에 세워진 생명의 경계
〈핵소 고지〉의 데스몬드 도스(앤드류 가필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입대하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살인과 총기 소지를 거부한다. 동료들의 집단 구타와 군사 재판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의무병으로서의 뜻을 꺾지 않는다. 마침내 무기 하나 없이 투입된 오키나와의 핵소 고지 전투. 아군이 전면 퇴각한 뒤에도 도스는 홀로 포화가 뒤덮인 고지 위에 남아 쓰러진 부상병들을 절벽 아래로 한 명씩 내려보내며 기도한다. "주여, 한 명만 더 구하게 하소서." 살육이 난무하는 가장 세속적인(Profane) 공간 한가운데서, 그는 생명을 살리는 성스러운(Sacred) 경계를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는다.
에밀 뒤르켐의 시각을 빌리자면,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전장에서 도스의 존재와 행위—부상병을 묶어 절벽 아래로 내리던 밧줄까지—는 부대원들이 공동으로 경외를 투사하는 일종의 '토템'이 된다. 토템이 성스러움의 원천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집합적 감정이 투영되는 매개인 것처럼, 도스 또한 그 자신이 신적 존재여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 의지와 인간성을 한 몸에 체현한 상징이었기에 경외를 받는다. 철저히 조롱받던 고독한 개인의 신앙은 어느새 붕괴 직전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정신적 구심점으로 변모한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12세기 십자군 전쟁기, 기 드 뤼지냥을 비롯한 호전적인 십자군 권력자들이 "신께서 원하신다(Deus Vult)"는 맹목적 명분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영토와 권력, 부를 향한 세속적 욕망은 종교적 언어 뒤에 교묘히 가려지고, 귀족들의 야망을 위해 평민들은 참혹한 전장으로 내몰린다. 십자군 원정은 타자를 악마화함으로써 권력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전락한다.
그 구조의 허상을 꿰뚫는 인물이 평민 출신의 기사 발리앙(올랜도 블룸)이다. 살라딘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방어를 떠맡은 발리앙은 성지의 돌벽을 사수하는 대신 그 안에 갇힌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준비한다. 처절한 공방전 끝에 그는 예루살렘을 내어주는 대신 성 안의 모든 기독교인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다는 보장을 얻어낸다.
2. 신의 이름을 부르는 두 가지 언어: 구원과 탐욕
핵심 질문이 여기서 떠오른다. 도스도, 발리앙도, 십자군을 이끈 왕들도 저마다의 신앙을 품었다. 그런데 왜 같은 신앙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학살의 명분이 되었는가.
막스 베버의 사회적 행위 유형론에서 보면, 도스의 신앙은 전형적인 '가치합리적 행위'다. 총을 들지 않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얻는 이익이 없고 오히려 생명이 위태로워짐에도 신념을 지키는 것은, 그 신념 자체가 이미 행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십자군 왕들에게 "신의 뜻"이라는 언어는 영토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합리적' 수단에 불과했다. 신앙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피터 버거는 종교를 인간 실존의 공포를 감싸 안는 '성스러운 차양(Sacred Canopy)'이라 불렀다. 십자군 귀족들이 권력의 이름으로 내건 차양은 탐욕을 성전(聖戰)으로 위장했지만, 도스가 스스로 짜 올린 차양은 어떤 제도나 권력도 개입할 수 없는—오직 개인의 양심과 신 사이에 오롯이 놓인—것이었다.
3. 돌벽의 예루살렘과 사람이라는 성지
영화의 후반부,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떠나는 발리앙이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What is Jerusalem worth?)" 살라딘은 돌아서며 담담하되 힘 있게 답한다.
"아무것도 아니지(Nothing). …모든 것이기도 하고!(Everything!)"
예루살렘의 돌벽과 흙먼지 자체는 세속적인(Profane)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공간에 수많은 이들의 신앙과 열망, 피와 눈물이 겹겹이 투영되는 순간,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성스러움(Sacred)의 결정체가 되어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거대한 상징이 된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각자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팽팽하게 쳐놓은 거대한 '성스러운 차양'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스와 발리앙, 그리고 살라딘은 이 역설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들은 물리적 영토나 율법의 문자—"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몰되는 맹목을 버리고, 그 안에 숨 쉬는 인간의 생명과 신앙의 본질—"모든 것"—을 지켜내는 선택을 했다. 발리앙이 무너진 성벽 대신 백성을 택하고, 도스가 살인 대신 구조를 택한 것은 신앙의 포기나 타협이 아니다. 껍데기보다 본질을 선택한, 더 깊고 성숙한 도약이다.
4. 화려한 제사보다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두 영화는 결국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인간은 혼돈 속에서 신앙을 통해 내면을 지키고 연대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종교의 보편적이고 숭고한 얼굴이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는 탐욕을 위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장막이 될 수 있으며, 그 신앙을 '가치의 목적'으로 대하느냐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하느냐에 따라 갈림길은 명확히 나뉜다.
도스와 발리앙의 선택에서는 눈에 보이는 성역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을 더 성스럽게 여겼다. 반면 십자군 왕들의 선택은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의 권력과 탐욕을 채우는 문법으로 이어졌다.
사무엘상에서 사울 왕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든 전리품을 진멸하라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살진 양과 소를 빼돌린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를 꾸짖자 그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남겨두었다"며 자신의 불순종을 신앙의 언어로 위장한다. 그때 사무엘이 던진 일갈—"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은 사울과 십자군 왕들을 동시에 타격하는 선언이다.
사무엘의 질책은 단순히 탐욕을 꾸짖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화살은 더 깊은 곳을 겨냥한다. 사울의 진짜 죄는 탐욕 이전에, 제사라는 형식으로 불순종의 내용을 덮으려 한 제의적 형식주의였다. 신의 명령에 응답하는 구체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화려한 종교 의례로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이것이 사울의 몰락을 부른 본질적 오만이었고, 십자군 왕들이 반복한 죄목이었다.
도스와 발리앙의 신앙이 진정성을 갖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 화려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도스는 제단을 쌓지 않았다. 총성이 멎지 않는 고지 위에서 피투성이 전우를 줄에 매달아 절벽 아래로 내리는 행위가 그의 기도이자 제사였고 신앙 그 자체였다. 발리앙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성문 밖으로 안전하
게 걸어 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이 그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신실한 예배였다.
전장이라는 지옥 속에서 성(Sacred)과 속(Profane)의 경계는 교리의 엄격함이나 제의의 화려함으로 그어지지 않는다. 그 경계는 오직 하나의 질문 앞에서 그어진다.
당신은 신의 이름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