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과 〈두 도시 이야기〉, 그리고 사회라는 신
1.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사회적 사실 앞에 선 인간, 그리고 자비의 재사회화
19세기 프랑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옥살이를 마친 장 발장은 출소 후에도 전과자라는 낙인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여관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은 등을 돌리며, 법은 그에게 영원히 노란 통행증을 지니고 다니라 강제한다. 형기는 끝났지만 사회의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그를 영구적인 범죄자로 고정하는 보이지 않는 벽이 사방에서 삶을 조이고 있었다. 그 압박감 때문에 발장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발장을 심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찰에게 "이 촛대도 제가 드린 겁니다"라고 말하며 은촛대 두 개를 그의 손에 쥐여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윤리적 전환의 결정적 장치이자,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재사회화의 출발점이다.
이후 발장은 마들렌이라는 이름의 사업가이자 시장으로 거듭나지만, 형사 자베르의 집요한 추적은 끝없이 그를 옛 죄인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그러나 발장은 팡틴이 죽어가며 남긴 딸 코제트를 거두고, 코제트가 사랑하는 혁명 청년 마리우스를 하수구 속에서 목숨 걸고 살려내며, 마침내 자신을 추격하던 자베르마저 용서하고 놓아준다. 법의 화신 자베르는 자신의 굳건한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엄격한 제도가 자비와 용서 앞에 패배하는 순간이다.
위고가 그리는 진정한 혁명은 바리케이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교가 촛대를 건네던 바로 그 순간, 한 인간의 내면에서 조용히 점화되었다.
2. 〈두 도시 이야기〉의 카턴과 다르네: 혁명의 제단 위에 바쳐진 희생
같은 시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찰스 디킨스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런던과 파리, 두 도시를 오가는 이 소설의 중심에는 세 사람이 있다. 귀족 신분을 버리고 런던에서 새 삶을 꾸린 프랑스인 샤를 다르네, 그를 사랑하면서도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방탕하게 살아가는 영국인 변호사 시드니 카턴,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사랑하는 루시 마네트.
혁명의 불길이 프랑스를 뒤덮자 민중은 자유를 외쳤지만, 디킨스의 눈에 비친 혁명의 광장은 해방의 축제가 아니었다. 다르네는 단지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단두대에 오를 위기에 처하고, 마담 드파르주는 뜨개질 속에 한 코 한 코 복수할 이름들을 새기며 군중의 분노를 직조한다. 결국 카턴은 다르네를 대신해 죽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단두대 앞에 서며 조용한 독백을 남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그 어떤 일보다도 훨씬 더 나은 일을 하고 있다."
디킨스가 진정으로 묻고자 한 것은 카턴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혁명의 본질이다. 억압받던 민중이 일으킨 혁명은 결국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의 사슬로 이어졌다. 처형하는 자와 처형당하는 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맹목적인 폭력의 논리는 그대로 작동한다. 단두대의 칼날은 죄 없는 이들의 목 위에도 무차별적으로 내려앉는다. 디킨스에게 혁명이란 해방이 아니라, 집단적 광기가 개인을 집어삼킨 참극이었다.
3. 두 작가의 배경: 혁명과 종교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
"역사가는 과거를 기록하지만, 소설가는 과거를 살아낸다."
두 작가가 혁명을 다르게 그려낸 이면에는 그들의 판이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빅토르 위고(1802~1885)는 혁명 속에 태어나 혁명 속에서 살았다.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직접 목격했고,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약 19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종교적으로 위고는 젊은 시절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점차 제도권 종교와 교권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렇다고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깊이 믿는 이신론적·범신론적 영성으로 나아갔다. 위고에게 참된 신앙이란 성당 안에 갇힌 교리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실천적 사랑' 그 자체였다.
찰스 디킨스(1812~1870)는 영국인으로서, 바다 건너의 혁명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물이다. 그는 영국 성공회 광교파(Broad Church)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가톨릭의 의례주의나 청교도의 엄격하고 배타적인 교리를 모두 거부하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 즉 산상수훈의 자비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실천적 기독교를 지향했다. 빈곤과 아동 착취 등 영국의 사회적 병폐에는 분노했지만, 폭력적인 군중 혁명은 '신앙적 가치를 상실한 파괴 행위'로 보았다. 그에게 〈두 도시 이야기〉는 혁명의 찬가가 아니라, 군중의 폭력성이 어떻게 악마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민중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지만, 위고는 인간 내면의 신성이 사회적 혁명과 맞닿을 수 있다고 믿은 반면, 디킨스는 혁명이 민중을 피비린내 나는 우상숭배로 이끌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4. 종교적 지평으로 읽는 구원: 실천적 신앙과 대속(Atonement)
두 작품은 사회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궁극적으로 종교적 구원의 서사를 취한다.
위고에게 구원이란 성육신적(Incarnational) 실천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신은 하늘에 있지 않고,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 속에,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구를 걷는 장 발장의 진흙 묻은 어깨 위에 있다. 위고는 제도권 교회가 타락하고 법이 억압의 도구로 전락한 세상에서, 한 개인이 타인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자비만이 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준다. 장 발장의 삶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성소가 된다.
반면 디킨스에게 구원은 십자가의 대속(Atonement)이라는 기독교의 원형적 진리를 따른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시드니 카턴은 단두대로 향하며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떠올린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혁명의 단두대가 피를 요구하는 '거짓 신(우상)'의 제단이라면, 카턴의 희생은 그 거짓 신의 논리를 깨뜨리는 '참된 십자가'다. 디킨스는 폭력으로 세상을 뒤엎으려는 군중의 길을 부정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적 희생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부활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역설한다.
5. 뒤르켐의 렌즈: 사회라는 신, 그리고 혁명이라는 의례
뒤르켐은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신이란 실제로는 사회가 스스로를 표현하고 숭배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종교의 핵심은 신비로운 믿음이 아니라 집단이 자기 자신을 신성시하는 과정이었다. 이 관점은 위고와 디킨스가 묘사한 '종교적 차원의 인간 구원'을 사회과학의 언어로 정교하게 번역해 준다.
5-1. 사회적 사실과 장 발장의 일탈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며 개인에게 구속력을 행사하는 힘"으로 정의했다. 발장의 비극은 빵을 훔친 행위 자체보다, 그를 영원한 '전과자'로 낙인찍는 억압적 형벌 체계와 대중의 냉대라는 사회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경계를 설정하고 그 밖의 존재를 낙인찍음으로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장 발장은 사회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확인하기 위해 희생시킨 제물이었다.
5-2. 자베르의 병리: 극단적 숙명론에서 아노미로의 추락
뒤르켐의 관점에서 자베르는 무규범(아노미) 상태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규제에 얽매인 숙명론적 인물이다. 그에게 법과 국가는 절대적인 신이다. 그러나 장 발장의 무조건적인 자비 앞에서, 자베르가 평생 믿어온 '법=정의'라는 집합적 표상은 산산조각 난다. 유일한 행동 준거가 붕괴되는 순간, 자베르는 급격한 아노미(Anomie, 규범의 붕괴 상태)에 빠져들고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존재를 지우는 길을 택한다.
5-3. 집합적 열광: 혁명이라는 세속화된 종교
뒤르켐에 따르면 종교의 본질은 신비적 믿음이 아니라 집단이 의례를 통해 감정을 증폭시키는 집합적 열광에 있다. 이 개념은 디킨스가 묘사한 프랑스 혁명의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혁명의 광장은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세속 의례의 공간이다. 단두대는 제단이고, 처형당하는 귀족은 혁명 공동체를 더럽히는 불순한 존재로 낙인찍혀 제거되는 희생물이다. 마담 드파르주는 이 광기 어린 신흥 종교의 사제와 같다. 혁명이라는 집합적 열광 속에서 이성은 마비되고 맹목적인 기계적 연대만이 작동하며, 정의는 억압적 제재의 형태로 폭주한다.
5-4. 혁명이 괴물이 되는 순간: 집단으로의 함몰
〈두 도시 이야기〉의 혁명 군중은 뒤르켐이 경계한 집단으로의 극단적 융해를 보여준다. 이념이라는 집합적 표상이 지나치게 강력하게 작동한 나머지, 개인의 윤리적 감각이 집단의 의지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 다르네는 스스로 귀족의 특권을 버렸음에도, "귀족은 타도해야 할 적"이라는 집합적 범주에 묶여 처형의 위기에 처한다. 군중은 개인의 고유성을 보지 못하고 오직 집단이 붙여준 꼬리표만을 본다.
5-5. 구원의 두 방식: 재사회화와 자기 헌신적 희생
장 발장의 구원은 재사회화의 과정이다. 미리엘 주교의 개입을 통해 억압적 집합 표상을 깨고 새로운 도덕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이를 타인(팡틴, 코제트, 마리우스)을 구원하는 행위로 끊임없이 실천해 나간다. 위고는 개인의 윤리적 실천이 얼마나 강력한 사회적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시드니 카턴의 죽음은 이와 다른 차원에서 뒤르켐의 이타적 자살 개념과 공명한다. 뒤르켐이 말한 이타적 자살은 집단에 과도하게 통합된 개인이 집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형태—군인의 전사, 순교—를 가리킨다. 카턴의 경우는 혁명 집단에 통합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뒤르켐의 정의를 넘어서는 더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희생이다. 르네 지라르의 언어를 빌리자면, 카턴의 죽음은 폭력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을 역으로 뒤집는 행위다. 군중이 다르네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바로 그 순간, 카턴은 스스로 그 자리를 대신함으로써 폭력의 사슬을 끊는다. 그것은 집단의 논리가 아니라 개인의 아가페가, 대속이 폭력을 이겨내는 순간이다.
6. 결론: 혁명은 어디에서 완성되는가
위고와 디킨스는 동일한 역사의 폭풍 앞에 서 있었으나, 서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위고는 "인간은 어떻게 갱생하고 연대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디킨스는 "집단의 광기는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종교적 통찰과 뒤르켐의 사회학은 이 두 질문이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합적 표상은 폭력과 낙인을 정당화할 만큼 강력하지만, 한 사람의 자비로운 행위(은촛대)는 그 철옹성 같은 표상에 균열을 낼 수 있다. 혁명의 군중이 집합적 열광에 취해 피의 제단을 쌓아 올릴 때도, 카턴처럼 기꺼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대속적 사랑은 살아남는다.
장 발장은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고, 시드니 카턴은 죽음으로써 세상을 지탱했다. 두 작가가 그려낸 진정한 혁명과 변화는 바리케이드 위나 단두대 아래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억압적인 '사회라는 신'에 맞서, 홀로 촛대를 건네거나, 기꺼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인간의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결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