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전공한 이들의 강점

by john ater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그림을 전공했다.



하지만 현재는 보수적인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 생활에서 내가 그림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되도록 말하지 않는다. 득 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입견이란 악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패시브로 작동하고, 이제껏 내 커리어와 함께한 분들은 대부분 학창 시절 인문계/이공계 코스를 밟아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개의치 않고, 심지어 들은 뒤 바로 까먹어 버리는 분들도 많다. 역시 사람들은 내가 우려하는 것보다 늘 나[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



요즘은 스티브 잡스의 'Connect the dots'같은 개념들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음을 긍정적으로 기대하는 태도들이 널리 성행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심지어 지금까지, 이 '시너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믿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그림이 실무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때가 있다.



그중 하나는, 큰 틀을 그리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론이다.



그림, 특히 크로키가 아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장기적으로 묘사하여 완성해 나가야 하는 그림을 그릴 때에는 우선 큰 틀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형태, 비율, 구도 등 그림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요소들이 큰 틀을 잡는 과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이때 결정된다.



결정적으로는 이 과정이 추후 세부적인 묘사를 하기 전, 계속해서 수정을 반복해가며 여러 시도 들을 해 볼 수 있는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이 과정이 지나고 지우지 못해 다시 그려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만큼 이 과정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후 대략적인 채색 혹은 명암 표현을 마치고 부분별 세부 묘사를 하는 일들은 비교적 재미있다.)




자칫 아무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고, 스스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이 불확실성을 견뎌내기보다는, 무언가 확실한 결과물을 '지나친 몰입'을 통해 만들어내는 실수를 범한다.


여기서 '지나친 몰입'이란,


(특히 초년생분들이)


제가 무언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라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시야가 차단된 경주마 마냥 업무에 몰입하여 적절한 방향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이 결과물은 주로 일의 방향성에 벗어나 있거나, 상급자의 의사결정 변경 등으로 인해 의미가 사라진 경우가 흔하다.




간혹 큰 틀을 갖추고 점차 '쪼개'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 지점의 세부 묘사(디테일)을 쌓으며 완성해 나가는 이들도 있다.


천재다.


하지만 그림의 영역에서도 이런 이들은 드물거니와, 업무에서는 더욱 드물다.


대내외적인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에 갖고 있는 열정이 과할수록, 해당 분야에 전문지식이 많을수록, 내향적 성향이 강할수록 빈번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이제껏 달관한 것처럼 서술했지만, 나 또한 신입 시절 내항인+열정 과다로 인해, 디테일과 완성도에 집중하여 시간과 관점을 소모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 습관 형성을 통해 이를 극복해 보고 있다.


지금도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이고, 제법 효과가 있어 간략히 소개한다.


1) ppt를 만들어 보고 하는 일, 특히 컨설팅 작업에는 목차부터 짠다.


2) 오전/오후를 나눠 적어도 1회는 내가 작업하고 있는 작업물에 대하여 '먼저' 보고하거나 공동 작업자에게 공유한다.


3) 리서치와 같이 시간을 소모할수록 매몰비용이 아깝고 좋은 결과물을 얻고자 욕심부리게 되는 업무는 물리적 시간을 정해놓고 진행한다.







%EC%9A%A9%EB%91%90%EC%82%AC%EB%AF%B8.jpg?type=w1 이런 상황은 피하자. 허벅지 명암 넣고 있을 때 말 말고 양을 그리기로 결정했다거나, 아예 그림을 엎어버리는 일이 업무에선 흔하다.




%EC%9A%A9%EB%91%90%EC%82%AC%EB%AF%B82.jpg?type=w1 이런 상황이 제일 좋다.시작 시 기대감을 한껏 낮춘 뒤에 반전을 보여주며 극적인 평가를 받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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