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삶에 대한 의문점
몇 년 전 어느 한 기업이 마케팅 일환으로 내세운 슬로건 “Do what you can’t”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한 친구사이에서라도 선을 넘는 듯해 보이는 과감한 조언을 기업은 마치 나의 오래된 지인 마냥 스스럼없이 내던지는 말투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당신들은 뭐길래 그런 무책임한 말을 던지며 대중을 호도하려 하는가? (캠페인에서 장애인들을 기업 이미지로 내세우며 해당 기업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책무를 다할 것이라는 기업의 의지를 반영하려는 선한 의도였을 것이다) 단순히 나는 그들을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적인 관점에 세워두고 그들의 선한 의도를 부정적으로만 오해하여 편협하게 해석한 것일까. 본질이 무엇이 되었든 해결되지 않는 찝찝함을 뒤로한 채 금세 나는 수많은 기업의 또 다른 슬로건에 휩싸인 세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제야 한낱 휴지조각처럼 잊혀버린 그 캠페인을 나는 지금에서야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려한다. 이 책을 읽고 난 순간 나는 되새김질하며 과거의 흔적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그토록 거리껴했던 마음속의 씁쓸함이 무엇인지 나는 분명한 이유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원제는 “The Impulse Society”이나 “근시사회”가 현시대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더 명확히 드러낸다는 표현이라 생각하여 저자와의 합의를 통해 정리된 한글판의 타이틀은 그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명확학 요점을 날카롭게 내비친다. 지금 현대 사회는 정말 이상하게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아니 너무 당연하고 올바른 이야기를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그 발언을 일삼는 작가의 의도가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더 불순해 보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기호를 표출하기 위해, 욕망을 실현할 목적으로 소비를 통해 나를 드러낸다.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일까. 오늘의 기분을 표현하라는 옷과 각종 장신구는 기본이다. 최신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은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가 맘에 드는, 때문에 내가 동경하는 누군가를 모방한 형태쯤은 나를 완성하는 아주 작은 조각임에 분명하다. 그렇기에 대중은 인플루언서로 대변되는 누군가(혹은 연예인, 선망의 대상)를 쫒고 따른다. 기업이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선구자에게 마케팅과 상업을 목적으로 계정을 일시적 매수하여 사람들을 또 다른 광고 창구로 활용한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기호에 기초한다면 목적이 불순하든 그게 뭐 큰 대수이겠는가. 나는 쫓고 쫓기는 끝없는 굴레에 갇힌 소비의 욕망이 이미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현대를 지탱하는 기업의 큰 톱니바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묵인하고 잘 따르고 있다 생각했다. 때문에 우리는 자아욕망을 조금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창구를 획득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보다 좀 더 우울해지고, 고립되고, 사회적 유대관계가 느슨해져 버리고, 정치적 관점은 양극화를 달리며, 신용불량자와 인격 없는 수많은 사회 사건들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반열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국제적인 이슈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차츰 발생하고 도처에서 번져나가는 현상을 나는 마치 GDP숫자가 상승하는 것만큼 호기롭게 지켜봐 왔는지도 모른다. 미디어에서 비친 경제성장률의 반향은 상승과 하락의 완곡한 흐름에 따라 마치 국민 모두가 반성과 자책 혹은 상장과 칭찬을 받아 마땅할 그 무언가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고분고분한 국민으로서의 나 개인은 그들의 이념에 당연히 다소곳이 수렴하여야 했다.
하지만 이 지점이 경제적으로 사회의 발전을 통한 국가를 탓하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은 수많은 혜택의 수혜자로 더할 나위 없는 풍요와 윤택한 삶의 기반 위에 마련된 국가의 국민을 나는 부정할 길이 없다. 다만 발전의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가 이렇게 까지 외면받고, 발전속도에 맹목적으로 열중한 나머지 지나쳐버렸던 배제된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에서야 우리는 묻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지독하게 이어진 사회의 룰 안에서 버려진 것 같은 지쳐버린 번아웃으로 자가 진단하지 않으면 멈출 길이 없어 보였던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고객이 소비자가 되어 자신을 찾는 역할에 심취해 있을 때 기업은 이에 호응하듯 재화를 넘쳐나게 제공하고 금융은 그칠 길 없는 욕망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막연한 개인의 이상을 차가운 순간의 만족으로만 대신했다. 편의의 끝을 달리려는 개인의 욕망에 대한 만족감은 무한한 욕심의 사회에서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곳에 살아남아 독립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우리의 가치를 지켜보려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쓸모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오늘의 편의를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게 근시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