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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Aug 17. 2024

자아가 있다는 착각

소비사회에 길들여진 나에게

영화 '인셉션'은 내가 아닌 타인이 주입한 생각에 기초하여, 자아가 행동하고 사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기본적인 개념을 흥미롭게 풀어낸 영화이다. '인셉션'을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저명한 감독의 블록버스터 작품으로 단순하게 치부하기에는 영화평가가 너무 편협하다. 영화의 근본이 되는 '인셉션' 자체를 과연 현실에서 적용이 가능할지 나는 경계가 애매한 이론 탓으로 의문을 남기며 영화의 콘셉트를 가상의 현실로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한 꺼풀 걷어내면 이미 우리 안에서 종종 이뤄지고 있는 현실처럼 보이는 모습에 기시감이 들어 영화를 단순히 픽션으로만 치부할 수 없겠다는 감탄과 한탄으로 감상을 토로했다. 


최근 회사에서 요즘 잘 나가는 유명 연예인을 고용하여 광고를 계획하고 있다. 광고는 겨우 6초 혹은 15초라는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비교될 수 없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며 광고주는 기업의 가치와 사상을 소비자에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소비자들은 미디어를 접하며 마주하는 짧은 광고나 미디어월, 광고판에 비친 광고들이 일상의 삶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를 노출시키며 지배된 자아가 치밀한 계산과 기업의 투자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받고 있는지 평소에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도청이나 몰래카메라를 감지하는 기계를 손쉽게 휴대할 수 있는 기술만큼, 대중이 휴대하기 편한 광고 노출 감지기가 우리 손에 쥐어진다면 그 기계는 언제 어디서든 시끄럽게 쉴 새 없이 울려 될 것이다. 


경쟁에 나선 대행사들은 기업이 원하지만 분명하게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판매 목적을 끌어내려 애를 썼다. (돈을 지불하는 클라이언트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이 대단할 뿐, 스스로가 명확하지 않다는 자각이 없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클라이언트의 애매모호한 목적성에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광고에 문외한이라도 들어봤음직한 대행사는 나름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다듬어진 시안으로 클라이언트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흥미로웠던 점은 대행사가 제시한 시안들이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으나 모델에 의존해 어떤 특색도 독창적인 특징도 없는 채, 그저 그런 뉘앙스가 기시감으로 범벅된 (그들은 특이하게도 일본 광고를 레퍼런스로 잔뜩 가져왔다; 다만 일본광고는 다양하며, 재미있다) 시안이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어떤 메시지로서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몇 초라는 찰나의 순간이 개인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진실이 제작자에게 깃들여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지만, 평소에 내가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은 더욱 이상한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의 상업소비가 당연시된 삶 속에서 나는 경제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세포처럼 누군가의 의미로써 존재의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평소의 나는 주체적이고 자아가 있는 것처럼 사고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감지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을 뿐, 사고의 기초는 어디서 본 이미지나 광고에 기반한 소비와 롤모델에 빗대어 자아를 기생시킬 뿐이었던 것이다.


기업은 저질스럽게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 고객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기업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모든 목적이 네 돈을 빼앗겠다는 것이긴 하지만, 그 과정은 매끄럽고 우아하게 동시에 절제하며 기품 있게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철저한 계획과 판단하에 이뤄진다. 그에 덧붙여 모델의 이상적인 허울과 그럴 듯 한 허풍(슬로건과 카피라이트)으로 버무려진 완제품은 완벽하게 고객(소비자)이 자아 스스로 결정한 주체적인 행동을 한다는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 타국에서 알 수 없는 번호로 걸려온 보이스피싱과 그 결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일상에서 그 증거는 넘쳐나서 오히려 그렇지 않은 예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온갖 상품 판촉을 가장한 프로그램이며, 사회규율에 맞는 삶과 몸매, 음식, 옷, 과식욕으로 도배되는 소셜네트워크만 보더라도 이미 대중은 철저한 누군가의 목적 하에 자아가 지배되어 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나는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고 또 누군가를 주입시키지 위한 철학을 설립하고 계획하며 타인과 나의 불분명한 경계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하루를 기획한다. 우리 스스로를 피폐화 시키는 동조에 우리는 스스로를 몰입시키면서 누군가의 자아를 그렇게 소비대상화로써 존재시킬 뿐일지도 모른다.


이미 대중은 남을 지켜보고 관찰하는 것에 익숙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유희 하에 허락된 사생활 공유와 치밀하게 짜인 상업적인 목적을 드러내지 않는 상품과 유행을 자연스레 눈으로 좇으며 그들이 선도하는 올바름과 흐름을 따른다. 과연 상업소비가 덕목이 된 지금의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과 생각이 충분히 존중받고 있는 것은 개인의 착각인가 허망한 욕심인가. 그것 또한 기업이 원하는 맛으로 가공된 철학으로 맞춰진 취향으로 이끌어진 개인화가 또 다른 목적을 향해 잘 정돈된 상품화가 되어있을 뿐이라는 씁쓸한 달콤함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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