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하여
'잘하고 있습니까?"
새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사실 항상 머릿속을 되뇌는 물음이지만, 나는 늘 현실적으로 질문에 답하기를 회피하며 들어도 모른 척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의 무거움에 부담감을 느낀다. 습관적으로 나는 질문의 책임감을 타인에게 밀어내며 아주 쉽게 무력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취한다. 스스로가 잘하고 있는지 명확한 답을 위한 근거가 불분명하기에 당연하게도 손쉽게 그 답을 얻으려 나는 타인에게 기대려 한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옆에 있는 친구가 가끔 찾아뵙는 부모가 지금의 나를 어떤 식으로든 평가해서 내가 걸어온 혹은 걷고 있는 지금을 금세라도 붙잡아 줄 것 같다. 아니 그마저도 번거롭다면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자아의 혹은 타인의 평가로 인한 결과에 불안함을 느낀다면, 불안한 나를 조금이나마 완전하게 보이게 하면 될 것이다. 이로써 쓸데없는 질문 따위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나는 질문조차 필요하지 않은 완벽 그 상태 그 자체이니까) 자연스레 나는 스스로를 완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지 주변에 온갖 상업적인 술수에 빠져든다. 적어도 (돈만 지불하면) 그들은 완벽한 나로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하며 밝고 활기찬 미래를 보장하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나는 손을 뻗는다.
이걸 먹어야 트렌드를 따라가지..
이걸 입어야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을걸?
이곳에 갔다 와봐야 요즘 세대라고 할 수 있지.
이걸 시청해야 사람들과 늘 대화가 통하지.
나는 늘 궁금했다.
언제인가부터 올해의 트렌드이며, 올해의 색깔이며 어떤 한 시점을 붙잡고 규정하는 그것들의 존재를. 사회는 어느 순간 분명한 무언가로 시대흐름을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발전된 과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시작했기에 수긍했을 뿐이었지 다수가 원하는 혹은 긍정하는 의견이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파악되지 못하고 측정되지 않는 것은 늘 불안함을 동반할 뿐이다. 구체화되어 상세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불완전했으며,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 빈약한 껍데기 일 뿐이다. 실상 껍데기는 구체화라는 허상을 뒤집어쓴 가상의 인위적인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을 받기 위해,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누군가는 없던 허상을 구체화하여 가공한다. 마치 찰나의 눈속임에 누구나 속아드는 마술처럼 사람들은 거짓에 동의하며 거짓이 바탕이 된 진실을 진정한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 너도 속고, 나도 속으면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 되어 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주 쉽고 복잡한 이론을 들이밀며.
우리는 이미 가상이 진실이 되고 현실이 되어버린 거짓 안에서 스스로의 유희를 내맡겨 버린 지 오래되어, 사람들은 무엇이 근원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 안에서 헤맬 뿐이다. 그곳에서는 진실을 쫓는 행위 자체가 숭고함을 지닐 뿐이지 결과적인 목적은 애초에 관심 대상이 아니다. 목적이 잃어버린 상태로 꿈을 좇는 자아들은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가 자각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습관이 되어버린 사고에 머물러 살아간 탓에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선호하는지,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은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선택의 폭이 다양해지고 다수가 전하는 이미지가 지금의 우월함을 획득하였지만, 여전히 나는 내 존재를 규정할 길이 없어 돌아갈 묘지 없는 길 잃은 영혼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정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만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