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하게 가공된 입맛에 대하여
아빠가 맛밤을 샀다. 36개들이 하는 한 박스가 경이로운 할인율을 붙이고 (마치 거저주는 것 같은 인상으로) 지금 아니면 못 산다는 가격협박으로 아빠를 일순간 매료시켰다. 할인가 사이트를 알려준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아빠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방식으로 온라인 쇼핑을 즐겼다.
집으로 배달된 수상하게 거대한 박스는 그 정체 자체만으로도 의심을 샀다. 엄마는 의아해했으며, 누나는 당혹스러워했다. 서른여섯 봉지의 밤 덩어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지구인이 한 공간에 두 명이상이 있을 때, 고성이 오간다. 아빠는 자신의 경제관념이 그들에게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서 매우 실망을 했다. 스크린 화면 속의 36개라는 숫자는 너무 평면적이어서 그것이 실체가 되어 현실에 도달하였을 때 느끼는 부피감과 무게감, 그리고 존재감은 너무 화면 속의 상품과 동떨어져 보였다. (이것에 대해 아빠도 수긍했지만) 완전한 동의를 표명하는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섯 봉지를 집에 들고 왔다. 약간의 강요 아닌 강제적인 배분이었지만, 간식으로 즐기기에 딱 안성맞춤인 것처럼 보였다. 한 봉지를 뜯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원재료가 밤 100%(그것은 중국에서 왔다)라는 깔끔한 표기사항이 나는 맘에 들었다. 동시에 상품으로 비닐 포장에 잘 밀봉된 밤이 손쉽게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낯섦에 나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할머니 집 근처 야산에는 가을에 밤나무에서 열리는 과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빠는 어린 추억이 깃들였는지 시골길을 걸으며 늘 바닥에 떨어진 밤송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순간 돌변해서 밤송이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적당한 도구도 없는 상태에서 고슴도치 같은 뾰족한 표면에 스스럼없이 그는 손을 뻗는다. 발로 잘 지르밟아 밤 알갱이만 쏙쏙 뽑아내는 기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연스럽다. (엄마도 같이 있다면 그 활동은 점점 본격적인 수확현장으로 변한다) 토실토실 잘 익은 밤송이에서 꺼낸 밤 알갱이. 그것들을 물에 담가 잘 닦아내면 신기하게도 자연에서만 발견할 법한 색이 빠져나온다 (심지어 천연 염색재료로도 사용한다고 하니 더 이상 붙일 말이 없다) 생밤을 한데 모아 깨끗이 씻어서 양지 좋은 볕에 마르도록 가지런히 배열한다.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오동통통 생겨먹은 둥그스름한 모양새가 곡식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배부른 포만감처럼 다가온다. 잘 마른 밤은 신문지에 싸서 냉장보관을 하거나 바로바로 먹는다. 명절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생율을 전담하는 아빠의 손놀림이 여기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손기술이 좋은 아빠는 껍질을 연필 깎는 것처럼 쓱쓱 표면을 제거해 나간다) 하지만 구워 먹는 밤이 나는 그렇게 좋았다. 열과 적절한 온도에 맞춰 쭈글쭈글해져 버린 구운밤은 겉껍질의 단단함을 벗어나서 부드럽고 밀도가 높은 포만감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다. 그렇게 까칠한 바늘 표면을 거쳐 단단한 껍질, 그리고 열을 거쳐 그렇게 수고로운 식량이 내게는 하나의 완성된 밤의 맛이었다.
포장지를 벗어난 밤 알갱이들에서 미묘한 거리감을 느낀 것은 그런 의미였을까. 단단한 통조림에 담긴 복숭아며, 먹기 쉽게 옥수수 알갱이만 고스란히 담겨있는 쇳덩어리. 그것뿐일까. 모든 식재료는 원물을 벗어나 (심지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형태로) 인간이 소비하기 가장 쉬운 형태로 새삼 놀랍지도 않게 식생활에 스며들고 있다. 이제는 추억 속에서 과거로만 남을 밤송이를 줍던 그날의 기억들이 나는 엄청난 유물처럼 내 사고 속에 기록되었을 뿐이라는 고전을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게 아빠가 온라인으로 주문한 맛밤 한 상자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