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상태를 역행하는 집착
정리되지 않은 상태가 싫다. 사람에 따라 정돈하지 않은 것이 뭐 그리 큰 대수인가? 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일례로 개수대에 놓인 설거지가 쌓인 상태가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남아있어 집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외출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바라본다. 나는 지저분한 상태를 그냥 싫은 게 아니라 마음 깊숙이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 분명하다. 화를 품으면 내면의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기에 세상 모든 지저분함을 묵인하고 마음 깊이 생각하지 않을 뿐, 나는 늘 그렇게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존재하는 상태만으로도 주변은 물건이 쌓이고 상태가 변질함에 따라 지저분해지며(형태가 훼손되거나 썩거나 낡아져서) 그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시간이 흘러가고 동작이 진행되는 것처럼 주위는 변화의 성질에 동반하여 원형을 잃어버린 복잡한 상태가 된다. 오히려 정리정돈은 이런 자연스러움에 역행하는 그릇된 행동이며(형태를 보존하거나 변화된 인상을 남기지 않도록 조정하는 가미를 더해), 순서를 뒤집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이것은 인간이 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빠른 기록에 집착하는 올림픽게임처럼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의 행동에 극찬과 열정을 담는 것과 같다. 자연스럽지 않은 비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 자연을 역행하는 정리정돈된 상태에 대한 동경과 예찬을 하기 시작했다.(이것은 새로운 올림픽 종목이 되는 건가?) 자연스러움을 극복한다는 미학을 담아서. '콘마리 메서드'라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뿜어내었던 어느 시기의 한 일본여성(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은 이런 세계인들의 관점에 자신들을 대변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과잉된 시대를 잠재우고 삶을 집약시키는 근원처럼 떠올랐고 사람들은 그녀의 "설레지 않으면 버리세요"라는 한 마디에 열광하며 물건을 대하는 각자의 삶을 반성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사람들에게 무언의 황당함을 선사했다가 논란이 일었는지 운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생각만 하면 모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과도의 물건이 넘쳐나는 세대에 이렇듯 정리정돈의 의미는 시대의 흐름의 변화에 다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아무것도 넘쳐나지 않았던 오히려 부족함이 급급했던 시기에 정리정돈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것과 대비되게. 사람들은 전후시대를 보낸 세대도 아닌데 왜 그렇게 물건에 집착하고 쌓여있는 소유한 물건에 대해 안심감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모두 과잉생산소비로의 일념아래 누군가가 주입한 목적을 수행하고 다 같이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제한된 공간 속 과도해서 통제불가능해진 물건들의 집합체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손끝하나 건드릴 수 없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여유도 없는 상태에 고착된 우리는 정리정돈이라는 대단한 위업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무언의 압박에 사로잡혀서 통제불가능한 소비와 계속해서 경쟁하며 할인 속에 물건을 쟁이는 행동은 지나침이 없다. 적어도 그런 행위는 아주 작은 기쁨과 행복의 즉각적인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인가? 치우는 것은 재미없다. 정리는 신기하지도 않고 즉각적인 반응도 없다. 대중들에게 적어도 정돈은 의무이고 누군가가 시켜서 해야 할 수동적인 상태일 뿐이다.
이번 주 목요일에는 점심을 먹고 돌아온 사무실의 상태에 문득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무언의 알아차림을 무시해 왔고 (심지어 반년 동안이나) 그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 무시해 왔건만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 공공의 공간이기에 사적인 감정을 담아 정돈되지 않아도 됨으로 분류하여 애써 외면해 왔건만 그동안의 묵인은 갑자기 유연해진 동료애의 무언의 압박이 잠시나마 해제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록처럼 따라왔다. 그 간격을 비집고 지금까지 막혀왔던 정돈에 대한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동료들에게 나의 정리정돈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언의 조율이 필요했다. 나의 행동은 사무실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별것 아닌 아주 작은 소일거리 혹은 여유시간을 메꾸는 아주 쓸데없는 작업처럼 보이기 위해 한쪽 귀퉁이에 놓인 원형의 협탁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의공간은 처음부터 하나의 원탁과 세 개의 짝이 맞지 않은 의자(인사팀에서 제공하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각자 어딘가에서 들고 와서 의자의 조합이 각각이었다)가 놓인 작은 영역이었지만 세 개의 의자는 널브러진 샘플과 박스, 알 수 없는 정체의 천 조각과 과자 부스러기(왜 먹다 남은 걸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쿠키와 함께 뒤덮어 있었기에 (사무실을 이동한 지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의자가 의자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테이블이 테이블로서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파헤쳐서 모습을 드러낸 필요가 있었다. 공용 공간은 각자의 공간을 뒤로하여 다섯 층으로 이뤄진 선반과, 냉장고 그리고 작은 책장이 창문을 등지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좌측으로 작은 회의 공간이 마련된 협탁이 있었고 내 계획으로는 원탁을 시작으로 선반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정리할 셈으로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역시 예상대로 되지 않기에, 내 작은 플랜은 이미 6개월의 세월로 축적된 다수의 흔적은 그 심각성을 단순화하기에는 영락없이 초라한 계획이었다. 소소하게 주변을 정리하면서 전체를 마무리하려던 계획을 뒤집고 (이미 나는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반팔을 걷어붙인 상태였다) 누가 뭐라 하든 이미 정리정돈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철이 지난 잡지책과 천조각 샘플, 먹던 과자와 그릇과 컵 샘플이 한 공간에 공존하던 선반의 분류시스템을 다 끄집어냈고, 앞치마 샘플과 반팔 유니폼들이 뒤엉킨 빨래 더미처럼 쌓여있는 구렁텅이를 분산하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거리는 움직임에 30cm 정도 앞에 앉아있던 동료들은 이제야 나의 행동을 무시할 수 없다는 듯이 미안해하며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다만 오히려 이 혼돈의 중심에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는 건 더 두려운 불편함이었기에 예의 있게 나는 도움을 거절하고 이내 나만의 정리 작업에 다시 돌입했다. 그들은 애써 민망한지 '업자가 오셔서 일당을 줘야 할 것 같네', '집에서도 원래 그렇게 깔끔하게 지내요? 집이 모델하우스 같을 거 같아요'라는 농담으로 민망한 상황을 메꾸려 했다. 앞으로는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에서 사무실을 써야지 내게 혼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사무실에서 한바탕 정리정돈을 하고 퇴근을 하니 오늘 하루 휴무였던 J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설거지통에는 먹다 남은 흔적이 흥건했고, 기름범벅인 프라이팬과 널브러진 분리수거 할 대상들이 부엌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또다시 우당탕탕 청소를 시작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고학년일 즈음부터 물기를 잘 짜내어 적적하게 수분이 머금은 걸래를 던져주며 본인들 방은 본인들이 알아서 청소하라고 시켰다. 나는 모든 집들이 그렇게 본인 공간은 스스로가 청소하는 게 원칙인 줄 알았다. 그게 미래를 내다본 교육이었나. 나는 그 습관을 넘어서 과도한 집착을 하고 있다. 지금도 타이핑하는 노트북의 화면의 먼지를 닦아내며 비자연스러운 상태를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