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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Feb 03. 2023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읽고


    

 우선 시집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알려진 대로 프랑스 유학 당시에 느낀 쓸쓸함과 환멸 그리고 그리움 등이 자욱하게 깔려있다. 듣기로 시인은 부인과 함께 80년대에도 한 번 프랑스로 유학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본 시는 90년 초 홀로 유학을 떠나 체험한 경험이 투사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아버지, 아들, 남편이라는 이라는 자신에게 씌워진 여러 정의를 넘나 든다. ‘높은 나무 희 꽃 들은 등을 세우고’라는 제목으로 36편의 연작시가 펼쳐진다. 당시 경험에 관한 시인의 개인적 소회들이 기록된 듯하나 질척이지 않고 담백하게 느껴졌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소소한 요소들이 깊이 있게 잘 표현되고 있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시의 화자이자 주체는 아버지, 아들, 남편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시에 드러난 분위기는 서정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주어진 역할로서의 그리움이나 애잔함을 담고 있지는 않다. 시선 너머에는 죽음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마치 얇은 겹으로 된, 아주 얇고 고운 종이에 그려진 그림들이 촘촘히 겹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처음 그림을 떼어내면 그 뒤에 다시 다른 형태의 그림이 있고 그 밑에 또 그 밑에 쌓여 새로운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참으로 단순하게 다가오고 우리를 산산이 조각낸 후에야 비로소 곁을 떠나는 것임을 그때 알게 되었다. ‘파리’라는 이국적 공간임에도 이질감 없이, 형광등 불빛만이 반기는 방으로 돌아와 ‘나는 뭐지?’하고 울어 본 적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시에 묻어 있어 좋았다.


 ‘여기 오래 있다 보니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거기 있을 때 나는 남편이며 아버지였지만 여기서 나는 다시 아들이 된다 여기 오래 있다 보니 어머니와 아내가 한 몸이 된다 내가 어머니라고 불렀더니 아내였고, 아내라고 불렀더니 어머니였다 확실히 혼동은 슬픔을 가져다준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17> 전문-     


 여기에 있으나 거기로 가나 시적 주체는 똑같이 남편이자 아들이고 아버지이다. 여기와 거기를 의도적으로 쓴 것은 마치 자신에게는 ‘꼭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심어주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와 거기는 사실상 불명확한 지시 대상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가족 내에서의 역할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외국에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순간은 누군가가 아버지, 여보, 아들아 라는 호칭을 직접적으로 건네는 그때뿐이 아닐까? 그렇기에 고독한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은 멀어지고, 언어의 직접적 지시로서의 ‘호칭’이 붙지 않는 나날의 연속은 화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너무나 이국적인 바깥의 풍경과 정신을 제대로 붙들지 않으면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는 말과 말 사이. 이 시에서는 하나의 자아가 부지불식간, 어떤 단호한 자기 확신 같은 것의 흔들림을 감지하면서, 정체성이 분열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쓸한 이방인이 입을 다물고 고국을 그리워할 때 그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 아들의 얼굴, 아내의 품이 한순간에 섞이며 재조립되어 혼동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특히나 두 개의 현실이 타국을 방황하는 외로운 이방인의 회상과 기억의 나열들 속에서 하나는 현실이고 또 하나는 희미한 몽상이 되었다가 다시 그 반대가 되는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고 서술하던 시선은 별안간 불만 없이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를 내는데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이다’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마치 저들은 실제 존재하듯 서로의 육체를 만지고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멀찍이서 보는 자신은 꼭 유령인 것 같아 이라도 갈면서 존재를 확인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여간 쓸쓸한 것이 아니다. 연작시 13번째 시에 드러난 것처럼, 1부를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는 자아와 그대가 아닐까. 여기서 그대는 단순한 타인이 아닌 그 사람이 내 앞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증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느껴졌다. 더불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한국에서는 이름과 작품만으로도 충분한 증명이 가능했던 시인에게 타국의 길 한복판에서는 그저 ‘한국에서 온 이성복 씨’라고 불렸을 때 느끼는 이방인의 느낌은 그를 더욱 고립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 ‘나는 그저 나’ 일뿐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타향 멀리에서 이방인이 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나는 정말 나인 것일까 혹은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맞닿는 당혹감은 홀로 남은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르는 사이 존재는 결핍하고 마는 것. 시인이 말한 우주 감기의 시작처럼, 미세한 개인의 우주가 가진 폭발력은 나비효과처럼 저 멀리로 거대한 기운을 보낸다. 빈 육체의 탈 밑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거기요, 거기! 거기에는 내가 있나요? 쉼 없이 질문하고 있다.     


 처음 2부 천사의 눈을 보았을 때는 1부와 따로 떼어놓고 읽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를 감상하면서 1부에서는 시적 주체가 한 몸이라 생각했던 자신과의 진짜 ‘존재’, 자아, 혼란스러운 이름과 같이 세상이 부여한 역할에서 시작하여 내밀하게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었다면, 2부는 그러한 당혹함을 충분히 경험하고 사유한 주체가 마침내 자기 안의 천 개의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라고 여겨졌다. 2부에서는 일상의 현상과 사물들이 시의 주가 된다. 시적 주체는 그러한 일상 속 평범한 사물들을 불필요한 설명 없이 차분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구백 아흔아홉 개의 눈은 덤프트럭 바퀴에 으깨어졌다 한 개의 눈은 그 모든 참사를 확인하도록 남겨졌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일천 사람들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었다’

 -<천국의 입구> 중에서-     


 나는 2부의 시들 중 천국의 입구에서 시인의 고백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눈이라는 것이 상당히 예민한 기관이다. 눈을 작은 것에 쓸려도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인간에게 눈이란 그저 ‘확인’이다. 그러나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고 세상을 관찰하는 자에게 눈이란 진실을 찾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이성복 시인의 시에서 드러난 눈은 ‘시선’의 의미라고 느껴졌다. 1부에서 세상과 자신 사이의 괴리를 쉼 없이 관찰했다면 2부에서 드러나는 그 시선들은 세상을 향한 집요한 응시와 같았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신분과 나를 명명해 줄 ‘그대’, 경계 위에선 자아와 초월적 타인을 찾아 헤매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시인은 비로소 시인으로서 자신의 눈을 찾은 것 같다. 시인의 역할이라는 것이 결국 실제와의 궁극적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덤프트럭에 깔려 고통받은 저 아흔아홉 개의 눈 이외에 여전히 펄펄 살아있는 한 개의 눈은 결국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삶의 비애와 고독, 외로움, 그리움, 기억 너머의 기억과 그것이 지닌 의미에 대해 무수히 많은 생각을 거친 주체가 마침내 ‘시인’이라는 존재로서의 눈을 뜬 것이다. 현실의 변화 과정 속에서 시적 출구와 진정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의식이 깃들어 본 시집이 풍요롭게 읽히는 것이 아닐까.


 ‘천도복숭아 같은 밤의 등불이여’라고 읊조리던 봄밤을 지나 ‘글쎄요 나도 그래요 왠지 나도 그런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엔 갑자기 몸이 허공에 뜬 것 같았어요’라고 말하며 가을날을 맞이한다.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아이들의 지친 잠에서 ‘보노라면 사는 일이 저들에게도 거친 일인 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아파트 앞길에서 길바닥 쓰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다 ‘뿌연 고치 속에서 막 부화하는 암나방’의 경이로운 생명을 본다. 차분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시의 시선은 긴장을 놓지 않고 세계와 하나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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