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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Feb 03. 2023

일만 하다 죽는다

「직업의 광채」를 읽고

 



 이 책을 산 것은 아마도 2012년이었을 것이다.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1편을 읽고 나서 ⌜직업의 광채⌟를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름만 들어도 놀라운 작가들의 단편이 한데 모여 마치 어벤저스를 보는 느낌이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도 글을 쓰고 싶다,라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아니 그러한 낭만에 더 빠진 것 같다. 작가들이 이 단편집을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단편 중 일이 부각되는 단편들을 묶은 기획 작품이기 때문에 어떤 직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란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낭패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일’이라는 주제로 묶여 있는 책이라 그런가? 다 읽고 나니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정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첫 번째로 실린 줌파 라히리의 <병을 옮기는 남자>였다. 자기 마음 안에 내밀한 욕망을 언어 내민다는 것은 이해받고 싶다는 인간의 신호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국 여자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라의, 다시는 만나지 않을 타인에게 자기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이드인 남자는 그러한 여자에게서 처음에는 막연한 환상이나 낭만을 느낀다. 하지만 여자의 말과 달리 태도는 진실하지 못하다. 그녀는 이해받고 싶기보다는 진실을 배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자기 속에서만 요동치는 감정의 리듬을 언어를 통해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은 통역사잖아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곪아있는 인간의 마음을 통역하기엔 가이드 또한 건강하지 못하다. 그는 실패한 자신의 꿈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되새기며 질병을 통역할 뿐이다. 능숙한 이국의 언어가 언젠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희망하면서. 인간은 다분히 어리석은 존재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목은 「축복받은 집」에 실린 제목인 <질병 통역사>가 더 탁월한 것 같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것은 이름도 어려운 ZZ패커의 <거위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충격을 주었다. 한 번도 미국의 여자가 아시아로 와 매춘을 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막연한 생각으로 미국은, 여전히 우리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그곳은 일종의 거대한 환상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인지. (물론 나는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온 매춘부를 본 적은 없다.) ZZ패커는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그들의 몰락을 그리고 있었다.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도쿄의 어디선가 아직도 거위처럼, 날고 싶지만 절대 날 수 없는 새들처럼 한데 모여 푸드덕 날개를 펼치는 시늉을 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마저 들 정도로.


 애니 프루의 <직업이력>은 형식적인 면에서 상당히 신선했다. 마치 아주 구구절절하게 써놓은 이력서를 보듯이 한 인물과 그 집안에 대한 흥망성쇠가 그의 직업이력에 모두 드러났다. 그러나 장황하지 않고 소설을 지탱하는 중심 이야기들도 세련된 힌트가 되어 문장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인생사를 관통하는 일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군상의 희로애락과 성공과 실패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이 소설은 상당히 상징적이었다. 동시에 한 인간의 인생이 이렇게 직업이력이라는 제목으로 축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 슬픔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먹고 살아야지, 그래 어쩌면 인간은 일만 하다 죽는 걸지도 모른다. 먹고 살려고 먹고 살다 보면 집도 사고 애들 유학도 보내려고 각자의 이유를 만들어 끊임없이 일만 하고 그것을 가족들이 독려하고 그러다 정년이 오면 후련해지기보다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공포에 팔자에도 없던 일들을 하게 되며 젊은 날을 후회하고 가끔은 웃고 그러다 생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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