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을 발생시키는 행로
사람들은 태어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고 가는 축복의 말이 무색하게 정작 탄생한 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고, 말이 트이기도 전에 무작정 살아야 한다. 삶을. 이 불가항력의 자연발생에서 기원은 어떤 의미에선 우연한 사건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저 삶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내내 고군분투한다. 영광을 차지한 자에게는 현재의 업적만큼이나 그 기원에 대한 풍부한 주석이 붙는다. 마땅히 태어나야 했던 사람,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그렇기에 인간은 ‘삶의 의미’라는 것에 그 어떤 생명보다 더 천착하는 것이 아닐까. 한 집안의 일상이 세보(世譜)가 되고 그것이 내가 모르는 후손에 의해 숙원 사업이 될 만큼, 우리는 나날들이 의미 있길 원한다. 기록될만한 기원이란 함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김금희의 소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평범한 우리 삶에 기원이 발생되는 순간을 짚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팔자’라 일컬어지는 환경의 제약과 타고난 조건들 속에서, 일찌감치 변방에서 평생을 날 것이라 체념하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자기만의 기원을 ‘발생시키고야’ 마는지. 기성세대가 만든 기준에 함부로 일별 되고 분류되며 상처받아왔지만 그래도 이만큼 잘 건너왔다고, 당신이 흔들리며 찍어 온 발자국들이 새로운 길을 내었다고. 작가는 채은경이란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은경, 오성, 강선. 족보 정리가 한창인 한 여름 고택 아래 세 명의 젊은이가 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아는 기오성에게는 신념이 돛대와 같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믿는다. 교수의 충고에 ‘누가 순진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할 만큼 자기 확신으로 차있다. 강선은 ‘마땅히 기록될만한’ 뼈대 있는 가문의 구성원이지만 자신의 혈통과 무관하게 무람없이 행동하며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 불화한다. 강선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믿지 않는다. 그러한 불신이 강선에겐 ‘확신’이다. ‘거룩한 사명처럼 미워할’만큼의 분노를 가진 채, 은경의 입장에서는 감히 가닿을 수 없는 고귀함의 세계를 짓이기고 스스로를 ‘페퍼로니’에 유배시키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의미를 지운다. 이 둘 사이에 은경이 있다. 은경은 자신의 가난을 기탄없이 고백하면서도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세계에 편입되지 못해 소외와 초라함을 느낀다. 틈입할 치기도 없으면서 내쳐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사람. 엇비슷한 나이대에도 이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있고 여기에서도 은경은 별다른 권력이 없다. 그래서 은경은 더욱 체념적이며 무기력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런 은경이 한 여름을 복기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단순히 기오성에 관한 인터뷰 연락이 왔기 때문에? 은경은 말미에 ‘연속으로 환기되는’이라는 수식어로 회상의 마침표를 찍는다. 기억이 남아 있지 않는 한 연속적 환기는 불가능하다. 은경의 내부에서 그 여름은 소거되지 않았음이 문장에서 드러난다. 연속적 환기를 다른 말로 풀자면 끊임없는 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의식하기 위해선 마음에 가닿아야 한다. 마음에 가닿은 것은 어떻게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녀에게도 술회되지 않은 지난날의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마흔의 은경을 만든 가장 확실한 사건은 고택에서 보낸 여름일 것이다. 목덜미에 빨간 주름이 잡히도록 사과꽃을 올려다보던 시절이 아득하고 한 여름만 선명하다. 그 시절이 은경을 지금의 은경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여름은 일종의 문제의식처럼 은경의 마음에 남아 있다. 은경이 기오성에 대한 인터뷰 연락을 받은 뒤 사촌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값을 이야기 한 도입부는, 그 여름과 기오성과 매듭짓지 못한 감정이 자기 안에 청산되지 않은 부채의식처럼 은경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 우리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의 진실과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끝난 뒤 천천히 행로를 복기해야 한다. 기오성과 강선은 믿었던 세계로부터 배반당하며 기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출처’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나가야 할 ‘믿음의 세계’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젊은 날 은경이 그들 사이에서 조금도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은경은 결핍의 자리를 완벽한 자기 신념으로 채우지 않고 결핍 그 자체로 보존함으로써 빈 공간을 응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이 은경을 이야기의 주체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오성을 만든 신념은 그 무엇보다 강하지만 노교수의 족보와 달리 물성 없는 기원이다. ‘얼마나 오래 추구하였는가’와는 상관없이 현재 어떤 태도를 보이냐에 따라 신념은 훼손된다. 훼손되어 버린 신념은 노교수 집안 족보의 미화된 사족과 달리 과장된 과오만을 낳는다. 기오성은 자신의 행동에 말미암아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렸다. 그의 실종은 예기치 못한 사건인 동시에 그 자신에게 필연이기도 하다.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기오성의 역사가 어떻든 그는 배신자일 뿐이다.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강선 또한 고택에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만이 들린다. 탈화 되지 못한 채 노교수의 세계에 머무는 강선은 현재의 시점에서 영원히 과거에 박제되었다. 오로지 은경만이 그것에서 자유롭다. 소설 초반 은경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신이 머물던 도시를 떠날 채비를 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겪었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모순적이게도 이는 은경에게 자신이 가야 할 곳의 자유를 부여하며 비로소 자기 기원을 재정립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은경은 ‘지금’에 온전히 남았다. 꿈을 꾸거나 이상을 가질 여유 없이 삶의 폭풍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로.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풍족한 생활과 멀리 떨어져 기간제 교사라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음에도 온전히 폭풍을 견뎌 온 사람만의 초연함이 그녀에게는 있다. 앞날을 확신하고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관조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은 은경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을 향한 인내로 증명된다. ‘교수에게서 세 달치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사게 될 중고차’를 사촌에게 썼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원망의 대상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이 삶이라 인정하며 흐르는 시간을 견뎠다. 세 사람이 온전히 자신을 털어놓을 수 있던 천변처럼 유유히 흐르며.
은경은 마침내 휴대전화를 든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 사이에서 ‘하고 싶은 말’을 택한다.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자에게만 해석의 자유가 주어지듯, 은경은 자신조차 정의 내릴 수 없었던 흐릿한 그 시절을 마주하며 비로소 그 여름의 발화자로서 확실한 권리를 얻는다. 은경이 하고 싶은 말속에서는 조롱거리로 전락한 기오성의 행로도, 페퍼로니로 상징되는 강선의 발칙함도 다시금 기원을 재정립할 것이라 믿는다. 굳건히 버틴 사람의 마음으로 다시 서술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섣부른 짐작이나 그릇된 비난 없이 온전히 그 사실 자체로 의미를 얻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제목은 ‘나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가 아닌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가 아닐까. 너와 내가 있어 우리가 있다. 비록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너를 만나 우리라는 기원을 얻었으니 나의 시작점은 그것으로부터 해도 좋지 않을까.
은경이 앞으로 해낼 말들을 미리 응원한다. 울면서 버텨온 시절을 나 또한 알기에 이 소설을 통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으면서도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어떤 시절들을 반추했다. 침착한 행로의 복기 뒤에 의미 있는 기원이 발생했다. 남은 날들을 든든히 이겨낼 만큼 중요한 삶의 찰나가 많았다. 비록 불쑥 삶에 내던져진 우리라도 결국 우리가 우리의 기원을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