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 초반에 심적으로 상당한 고생을 했다. 누가 빚을 받으러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나를 폭력적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도 많았고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쳤는데도 말이다. 그냥 나 자신이 나를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그때 내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모든 게 좀 느리다. 이해력도 느리고 사춘기도 늦게 오고 화장도 늦게 하고 대신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것은 후에 나만의 장점이 된다. 하지만 그때는 그러한 꾸준함을 장점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술을 꾸준히 먹어 버리고 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술을 먹었던가? 준법정신이 투철했던 나는 만 20세 이전까지 음주를 하지 않았다.(무단횡단도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했다. 그때 도덕적 순결을 잃었다고 한탄한 기억이 난다.) 1월 1일이 되어 친구들이 술을 마시자고 해도 굳이 생일까지 기다려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게 되자 알았다. 내가 술이 세다는 것을. 그리고 술이 내 입에 착 감긴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시작이었으니 나는 술이 취할 때까지 술을 내장 안으로 들이붓느라 돈과 시간을 음주에 거의 다 쓰고 만 것이다. 이때의 나를 떠올리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라는 주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그때의 나를 가리켜 '렉이 걸린 시기'라 농담하기도 한다.
친구들은 그때 그 정도 술은 마시지 않았나?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친구들이 본 것만으로는. 하지만 내 문제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내가 자취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취기가 조금 도는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라디오를 켜고 당시 단골이던 '은해성'에 전화해 짬뽕과 맥주 12병을 시켰다. 아홉은 아쉽고 열은 모자라며 열하나는 홀수라 외롭고 열셋은 불길하다는 나름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은해성인가? 은해성이 짬뽕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시쳇말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맛'으로 배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그곳의 장점은 맥주를 병으로 배달해 준다는 것. 당시 내가 살던 곳에는 편의점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고 주변 슈퍼들은 12시면 모두 문을 닫았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것이 은해성인데. 이 말인즉슨,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잠들지 못하고 술을 홀짝였다는 말이 된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그러다 세 번. 세 번이 네 번이 되고 나중에는 거의 일주일 내내를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들 수 있었던 것은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배달을 하던 사람이 주문한 짬뽕과 맥주를 건네주고는 집안을 쓱 둘러보는 것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한 10분 뒤 다시 벨이 울렸다. 작은 창으로 확인하니 배달부가 서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친구에게 일단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저기." 배달부의 낮은 음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좁게 열린 문 사이로 무언가를 들이밀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식 양념에 절인 닭발이었다.
닭발. 나는 종종 이 닭발 이야기를 내가 쓰는 소설에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항상 실패로 끝이 났다. 한 번은 학교 수업 중 익명으로 자신에게 제일 각인된 어떤 이야기를 써내라는 주문을 받았다. 종이를 섞고 무작위로 뽑아 그 이야기를 토대로 엽편 소설 하나를 쓰는 과제였다. 내 종이를 뽑은 사람은 내가 자주 칭찬하던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나의 닭발'을 토대로 상처를 받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써냈다.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 닭발을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그럴 것이다. 내가 닭발을 받아 들고 느꼈던 그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압도' 정도밖에 없다. 그야말로 감정에 압도당한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은해성에 짬뽕과 맥주를 시켜 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술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낮에 미리 술을 사는 식으로 알코올에 대한 충족감을 채웠다. 하지만 곧 이것도 끝이 났다. 물론 술을 끊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아직까지 내 인생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조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가 닭발을 받아 들고 아마 친구에게 "아, 닭발."하고 말했던 기억은 난다. 그렇다. 닭발을 보고 닭발이라고 하지 오리발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말을 곧장 이을 수 없어 전화를 끊었는데, 나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쏟아냈던 것 같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넘어서서 이제까지 나를 억누르던 감정에 대한 토로였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다음 날까지 머리가 얼얼하게 울렸던 것 같다.
3500원. 나는 포장 그대로 썩어가던 닭발을 들고 슈퍼로 가 비슷한 종류의 닭발을 찾아보았다. 가격대는 보통 3000원에서 5000원 사이였다. 내가 받은 닭발의 크기로 보아 대략 3500원에서 4000원 사이일 거라는 추정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3500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배달부는 분명 곧바로 닭발을 전하지 않고 10분이라는 시간을 소비했다. 다른 배달도 있을 텐데 일부러 어디에 가서 사 온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배달부는 처음 문이 열렸을 때 닭발을 내게 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배달 중 길에 떨어진 새 것의 닭발을 찾았을 리도 없다.(확률은 0.99퍼센트 정도)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물건을 건넴과 동시에 내 집을 쓱 훑어보며 어떤 감정에 휩싸여 부러 닭발을 구매해 내게 건네 준 것일 텐데, 나는 그 생각을 하면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린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살던 집은 원룸이었지만 평수가 넉넉했고 상태도 깨끗했다. 하지만 어둠의 기운에 휩싸여 온종일을 보내던 나는 웬만하면 불도 켜지 않고 누군가를 초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집안에는 항상 냉기가 가득했다. 그때 그 배달부가 얼마나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여러 집에 배달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의 주거 상황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 집의 문이 열리는 순간, 아마도 무언가를 느낀 것이 아닐까. 워낙 1인 거주 여성이 당하는 사건 사고들이 많다 보니 그 배달부가 나를 어떻게 해보려 했다는 합리적 의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의심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닭발을 건넬 때의 표정을 보았으니까.
사실 그 표정보다 나를 사로잡던 것은 배달부의 손이었다. 배달부는 손가락이 3개였다. 아마도 사고를 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늘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엄지발가락만 살짝 쓸려도 엄청나게 아픈데 손가락이 3개라는 것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 지나간 흔적일까. 보는 나까지 손등이 저릿했다. 나는 그 손가락을 오래 쳐다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늘 빠르게 시선을 회수했지만 어쨌든 문이 열리면 그 손가락에 눈이 머물긴 했었다. 이건 정말 과대망상일 수도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의 손가락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머물듯 그 사람도 나의 슬픔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문 것이 아닐까 싶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영역. 물론 그의 손가락과 나의 정신적 미성숙을 대비하는 것은 상당한 실례가 되겠지만.......
아아, 닭발. 나는 그 닭발을 한동안 버리지 못했다. 멍하니 그 닭발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나의 어떤 고장 난 내면을 똑바로 마주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미래를 계획한 것은 아니다. 과정은 아주 더뎠고 우선 망가진 나 자신을 수습하는 것도 벅찼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고 내 생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뭐, 닭발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원동력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닭발을 뜯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내 생애를 통틀어 제일로 슬픈 닭발이 떠올라 코 끝이 시큰해진다. 나도 배달부도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었고 그때를 끝으로 더 이상 마주하진 않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친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시간이 흐르고 아이를 낳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아주 잠시라도 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설령 말하고 행동한 당사자들은 까맣게 잊고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친절에 마음을 추스른 사람들은 그 따뜻한 배려의 힘을 절대 잊지 못한다.
나는 이제 자기 연민이라는 질척거리는 마음의 짐을 버리고 과거의 나 자신에게 인사할 수 있다. 닭발을 받아들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아이는 괜찮을 것이다. 좋은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쌓고 자신의 꿈도 찾고 누구보다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이 넘치는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지금의 단단한 나를 만든 것은 그때의 슬픔이다. 그러니 내 생애 가장 슬픈 닭발을 나를 이제 명랑한 어조로 되뇌일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닭발이여,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머물길. 설령 나 자신이 타성에 젖은 노인이 된다해도 그 고마움만은 잊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