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쓴다는 것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우선 에세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개인의 상념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한두 가지 주제를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으로 논하는 비허구적 산문 양식. 에세이는 통상 일기·편지·감상문·기행문·소평론 등 광범위한 산문 양식을 포괄하며, 모든 문학 형식 가운데 가장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에세이 [Essay]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부끄럽지 않으나 그렇다고 별 달리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을 씨앗 삼아 이야기를 써보려 하니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이 뭐라고, 모험도 뚜렷한 성공도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았을 뿐인데.
백지를 앞에 둔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삶의 무엇이 특별하며 이야기할 만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감히 누군가에게 나의 생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곧 이것이 나를 향한 기만임을 알아챘다. 우리가 명작이라 불리는 많은 소설을 생각해보자. 그 모든 책들은 백 년동안의 고독처럼 방대하지도 죄와 벌처럼 지독하리만큼 깊지도 않다.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평생 아버지와만 시간을 보내며 쓸쓸히 늙어간다. 어떤 인물은 도서관 사서를 하며 스스로도 자기의 생이 지루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변화를 하거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 것은 지난한 생처럼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인해서이다. 수많은 이야기만큼 다양한 삶이 나오고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웅장하고 위대한 인생이 나온다고 다 좋은 소설이 아니다.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도 특별한 것을 길어 올리는 일,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어찌 보면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숨 쉬는 모두에게는 생명이 있고 생명은 삶을 부여한다.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 행복에 겨워 사는 사람. 삶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다. 작가는 그러한 여러 인물들에게 생생한 삶을 부여하고 마치 살아있는 인물처럼 만든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대중이 내리는 것이지만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진지한 태도로 일정량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작가의 시작이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나의 삶을 재료 삼아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나의 지루한 생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사람도 나다. 내가 나의 삶의 그 어느 것도 글로 쓸 수 없다 생각한다면 그것이 내가 나를 업신 여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니면 작가로서 역량이 전혀 없는 것이겠지.
나는 이제 내 몸이 영사기가 된 듯 내 머릿속 추억의 필름을 허공에 상영하며 기억의 구석구석을 가름한다. 행동하는 용기를 준 것은, 사전에서 본 에세이의 정의 때문이다. '모든 문학 형식 가운데 가장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는 것 가운데 하나.' 이 문장은 내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에세이를 쓰게 되면 마치 내 글의 형식처럼 나의 삶도 유연하고 융통성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공상을 하면서.
오늘 내가 바라본 하늘, '무심코 지나친 모든 것에 내가 인내심을 발휘했더라면 내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바라보지 않고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그것은 내 삶에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수백만이 지나치고 갔을 오늘의 하늘은 내가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으로 글을 지었다. 그러니 오늘의 하늘은 특별하고 하늘 덕에 내 삶도 귀중한 이야기 하나를 얻었다.
에세이. 나의 상념과 경험이 재료가 되어 나의 인생을 글로 풀어가는 것, 그것은 결국 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알맞은 단어와 문장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나에게 생을 다시 한번 사는 일이 된다. 내 삶의 궤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때보다 커진 나의 발자국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 일. 삶은 글과 달리 퇴고가 없지만, 글을 고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삐뚤어지고 모난 마음을 고칠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에세이를 쓴다. 내 모든 사랑과 내 모든 실수와 내 모든 반짝이는 것들이 보다 더 윤이 날 수 있게 글을 고친다. 인내도 사랑도 글도 쓰지만 달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