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사람 산다는 것은 거기서 거기
바다를 품은 어느 광역시에서 성장한 내가 경기도의 한 도시로 이사한 것은 15살 무렵의 일이다. 서울이 아니라고 그렇게 설명해도 친구들은 서울 근처면 서울이나 마찬가지라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침울했다. 단순히 가세가 기운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해야 했던 집안 사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월간 만화 잡지에서 어린 왕자까지, 나의 독서력을 만들어 준 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 귀퉁이 작은 동네 서점이었다. 핑크플로이드며 AC/DC, 오지 오스본과 메탈리카까지 한창 외국의 록음악에 빠져 있던 당시, 사전을 구비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미국 음악 잡지를 구하기 위해 나는 친구와 동네 악기점을 돌아다니곤 했다. 어린 소녀 둘과 록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흥분하던 사장님의 열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도 한 장 없지만 친구와의 수다만 있으면 동네 곳곳을 누비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매 끼마다 야물게 섭취하며 뼈와 살만 무럭무럭 키운 것이 아니었다. 내 왕국의 거대한 골조 또한 그때 지은 것이었다. 여태까지도 그보다 힘센 정서를 만난 일이 없다.
정든 동네를 뒤로 하고 작은 트럭 앞좌석에 몸을 실었을 때, 백미러로 보이던 골목이 일렁이던 것이 생생하다.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열기가 맴돌며 만들어낸 아지랑이들. 돌부리에 걸려 차량이 덜컹이면 어쩐지 몸이 아니라 심장이 털썩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영영 머물 줄 알아 미뤄두었던 계획과 다시는 확인할 수 없는 그곳에서의 내 미래들이 조각난 채 밑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날 고속도로는 유난히 막혔는데 소중한 것을 뚝 떼어놓고 떠나는 나의 무거운 발걸음과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보금자리 한 편에 채 풀지 못한 짐들을 바라보며 가족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낡은 선풍기는 달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이전보다 훌쩍 줄어든 평수에 반비례 해 훌쩍 커버린 동생의 다리가 자는 내내 나의 배를 짓눌렀다.
단짝 친구들의 일과는 익숙한 매일에서 ‘새로운 소식’으로 변모하여 내 방구석에 편지로 쌓여갔다. 무리에서 쫓겨난 기분으로 그들이 보낸 소식을 읽어 내려가기 일쑤였지만, 다행히 ‘적응’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나를 환대하는 새 친구들이 있어 주었다. 다양한 아이들만큼 다양한 마음들이 있었고 그중 내 마음과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십 대라는 나이는 그런 점에서 좋았다. 누구보다 재빨리 휘몰아쳤지만 누구보다 빨리 휩쓸리기도 했다. 나는 유화를 덧칠하듯 새로운 색으로 예전의 기억을 덮어버렸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나는 다시 ‘동네’를 의식하게 되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50분을 소비해야 하는 등교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든 감정은 내가 그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구시가지에 ‘산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학교는 신도시에 위치한 비평준화 학교였다. 서울로 접근성도 좋았고 깔끔한 환경 덕에 그곳의 집값은 착륙을 몰랐다. 구도심과 신도시 학생들 간 학업 차이가 또한 확연했다. 구도심에서나 우등생이었지 신도시로 가면 두 자리 등수가 불 보듯 뻔하면서도 굳이 그곳에 진학한 이유는, 내게 무슨 학업적 열의가 있거나 야망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그 학교를 갈 것이라는 소문을 들어서였다.
아쉽게도 그 아이는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아침이면 채 말리지 못한 머릿결을 경쾌하게 털어내며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일이 즐거웠고 귀에 꽂은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가수의 노래는 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터널을 지나면 확연히 달라지는 풍경도 흥미로웠다. 공간이라는 것이 터널 하나를 두고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겨우 터널일 뿐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우뚝 솟은 언덕 가장자리로 퍼즐 조각처럼 주차된 차량이 즐비하고 도로변을 따라 걷는 도둑고양이들이 길가의 쓰레기봉투를 몰래 뜯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신도시의 거리에는 전봇대가 없었다. 당연히 거대한 빨랫줄 모양으로 늘어진 전선도 없었다. 도둑고양이는커녕, 하늘을 날던 새도 착각해 부딪힐 만큼 뽀득뽀득 윤을 낸 빌딩과 쇼핑몰만이 가로수와 함께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 세상이 시작됐다.
우정이 무르익어갈수록 아이들은 금세 마음을 털어놓았다. 악의 없는 솔직함 속에서 묻어나던 편견의 순간. 내 안에서는 조금씩 천천히 여러 모양의 생채기를 만들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베란다의 창문 개수로 아파트 내부의 평수를 짐작하는 법을 배웠다. 신도시의 그들이 타인과 대화할 때면, 자신이 사는 곳의 ‘시(市)’를 말하는 대신 ‘구(區)’를 말함으로써 본인의 환경을 가늠케 한다는 사실 또한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건네받은 촘촘한 욕망의 사슬로 옷을 해 입기 좋아했다. 부자연스러운 발걸음들이 뒤뚱거렸지만 걸친 옷을 좀처럼 벗지 않았다. 옷깃은 더욱 단단히 여며졌다. 욕망이 그들의 부모를 동네로 이끈 것인지 동네가 그들의 욕망을 만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속한 동네를 말하는 것이 약점이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말수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나는 ‘내 집’이 있는 동네를 생각하며 안온한 보금자리를 떠올리는 대신 반드시 벗어나야 할 위치로 인식하게 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상처를 털기 위해 스스로 취하는 오기였거나 매일 만나는 또래들 사이에 정식으로 합류하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거나. 어쩌면 사는 곳이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점으로 나는, ‘어른’의 문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차가운 동시에 나를 불태웠고 잔인한 동시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으로 공간을 채우는가 보다 어느 동네에서 무슨 아파트에 사는 것이 더 중요해져 버린 요즘, 나는 어느덧 신도시의 아이들보다 그들 부모의 입장에 더 가까워졌다. 그토록 충실히 경멸하던 어른들을 닮아버린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다.
나는 가끔 심상에 젖는 날이면 어릴 적 내가 떠나온 그 동네로 돌아간다. 다시금 동네를 찾기 위해선 버스 티켓 대신 ‘거리뷰’를 검색하기만 하면 된다. 컴퓨터 모니터 사이즈만큼 크기를 줄이고 화살표를 따라 손가락을 까닥하면 대부분의 골목을 누빌 수 있다. 변모한 동네 초입에서 지칫거리다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젊음의 위용을 뽐내는 빌딩들 사이에 드러난 추억은 내 기억보다 훨씬 더 늙어 있다. 마치 변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재난인 듯 재개발 추진이라는 글씨가 수 놓인 옷을 입고서. 건물을 클릭하면 정성스럽게 정리된 시세가 등장한다. 추억의 엔딩 크레디트는 숫자로 마무리된다. 그제야 그곳이 얼마나 낯선 곳인지 실감한다. 실존에 대한 개념이 시대마다 분분한 의견을 가지듯, 그곳이 내가 떠나온 동네라 하여도 더 이상 그곳은 나의 동네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 ‘동네’를 선물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을까. 나 또한 머리로는 동네를 회상하며 한 손으로는 욕망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고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밖에. 난민의 심정으로 숫자의 꽁무니를 졸졸 쫓으며 찍어댄 내 발자국이 숱하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엔 나의 윤리가 온전하지 못하다. ‘먹고사는 문제’는 마법의 주문처럼 변명을 대신한다. 쓸쓸한 마음을 울컥 게우는 것은, 아마도 무엇이 더 사람다움에 가까운지 알기 때문이리라.
동네가 사라지고 있다. 내 어릴 적 동네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면 이제 동네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동네’라는 단어마저 사어(死語)가 되기 전에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혀를 굴린다. 흐릿한 감각만 있을 뿐 음성은 이내 허공 위로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