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그리움

by 존치즈버거


어린 시절, 나는 친구 집 앞에 무작정 찾아가 큰 소리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창문으로 쑥 고개를 내민 친구는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한달음에 내려와 나와 놀이를 시작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친구가 내 집 앞에 찾아와도 그랬다.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우리는 친구의 이름으로 대신하면 그만이었다. 하릴없이 거닐면서도 모든 것이 흥미롭고 귀중했던 시간들. 그 빈둥거림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내가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아 있다.


15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지나 불현듯 연락한 내게, 고등학교 동창인 Y는 이렇게 말했다. “너 혹시 결혼하니?”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나는 장황하게 나의 연애사와 결혼식 에피소드를 털어놓았고, 그다음 이어진 “너 혹시 보험 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젊음을 지배하고 있는 ‘문학병’에 대해 털어놓게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허심탄회한 고백의 시간을 가졌음에도 이상하게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처음보다 더 어색한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피천득 선생이 첫사랑인 ‘아사코’를 만난 뒤 풀어놓은 소회를 담은 ⌜인연⌟에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아니 만남보다 못하였다.” 내가 Y와 다시 연락이 닿고 느낀 감정이 꼭 그랬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받은 영향을 자양분 삼아 문학이라는 광활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전혀 불편할 것이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 놓인 장벽은 쉽게 허물 수 없었는데 그것은 ‘시간’이라는 벽이었다. 그리고 그 벽은 단순히 ‘너와 나’ 사이에 쌓인 왕래 없는 길목에 방치된 먼지 덩어리와는 달랐다.


성과 시대. 이 말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취미를 가졌을 때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성과를 내야 한다. 아무런 결과물도 없다면 흘려보낸 시간은 고스란히 실패다. 남이 힐난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타인들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될 거란 기대도 없으면서 매시간 매초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가치를 가늠한다. 참 희한한 ‘자기 속박’의 시대다. 이제 여유란 즐기는 것이 아닌 ‘누리는’ 것. 삶의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물이 그 사람의 척도를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의 성과가 되기 시작했다. SNS만 해도 그렇다. 나에게 속한 친구들이 나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 보다는 그 숫자가 더 중요하다. 목적 없이 만나 수다를 떨고 나면, ‘어쩐지 실속 없는 사이가 된 것 같아.’라며 자조하게 된다. 그 시간이 나를 얼마나 해방시키고 웃게 했느냐 보다는 손가락을 펴 셈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친구를 만나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 도움은 정신적인 것에 머물러도 좋겠지만 시간은 사람을 나이만큼 욕심도 먹게 만들어, 눈에 보이는 도움만에 감사하게 만든다. Y와 나 사이에 놓인 장벽은 그것이었다. 우습게도 ‘어른됨.’ 목적 없이 그리움으로 닿는 인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어떤 단계. 세월의 상처가 만들어 버린 단단한 방어벽. 나는 Y와 안부를 물으며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 벽을 생생하게 체감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란들 별 수 있을까? 내가 수신인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본다. 아주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상대에게 종국에 내뱉는 말은 “왜?”다. 목적 없는 그리움이 용인되지 않는 상태는 너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이득을 취하지 않고 그저 그리움만이 가득한 안부 인사를 언제 나누어 보았나. 그런 생각을 하자 다정함마저 경계하며 마음의 덧문을 닫아 두고 사는 것이 어른인가 싶어 마음 한 구석이 갑갑해졌다. 나를 향한 순수한 그리움을 마냥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어린 날보다 더 작아진 내면의 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사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보다 ‘인맥’이라는 단어다. 인맥이라 함은 어떤 특정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그 특정 소속을 근거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관계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특정 장소로 가야 하고 그러한 장소에서 맺어진 인연은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운 좋게 목적 이상의 감정이 유발된다 해도 내가 그와 관계 맺을 자격을 박탈당하면 그 관계도 쉬이 깨지고 만다. 그러니 사람들은 단단히 채비를 한다. 그 거대한 줄기 위에 올라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날이 바짝 선 굽을 가진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끈을 한없이 조인다. 열길 물속보다 어려운 한 길 사람 속을 등반하다 보면 사람으로 만들어진 산줄기에 정작 사람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들인 고생이 있으니 멈출 수 없다. 이만큼 고생했는데 그리움이나 찾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여유를 받치고 내 영혼까지 받쳤는데. 그리움을 들먹이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느슨한 날들이 필요하다.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고 내가 관계 안에서 ‘낙오’될까 염려하며 가까스로 버티는 힘의 남용을 멈춰야 한다. 때로는 풀려 버린 나사처럼 조금 헐거운 마음으로 그리움을 부를 줄 알아야 한다. 막연하게 감상에 젖은 말로 끝나서도 안 된다. 만연한 정서가 세계의 지형을 바꾸기도 하니까. 이렇게 계속 긴장만 하다 보면 관계 속에도 경쟁이 만연하게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삼귀다’라고 하겠는가. 썸만 타다 끝나는 우리 시대의 젊은 사랑들이 정말 인류적 종의 변형으로 ‘쿨’한 유전자만 가지고 태어나서 그럴 리는 없다. 무서운 거다. 상대에게 전송될 나의 애정이 결국은 소모될 데이터보다 더 하찮아질까 봐서. 그래서 따지고 재기만 하다 어느새 어른이 된다. 그리움의 구덩이를 한없이 파고 아무도 보지 않게 홀로 들어가다 보니 요즘 세상에 ‘사이’는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거리’와 ‘펜스’만이 생겼다. 사랑을 말할 어른이 없으니 세상은 조금 더 추워졌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에게서 물어야 할 것은 안부가 아닌 목적이다. 세상의 법칙처럼 사람 사이에도 기형적인 룰이 장벽처럼 세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로봇이 아닌 사람이다. 정신없이 떠밀리듯 살아도 사람은 사람이다. 핸드폰 주소록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정작 내 마음 털어놓을 곳이 없다고 한탄하며 홀로 방구석에 몸을 구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만 이렇게 외로운가 생각하다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인터넷 익명 게시판을 보면서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 주변에도 좋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허약하고 상처 받은 마음이 쉽사리 곁을 내주지 못할 뿐.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에게 사람이기에 사람을 찾는 여유쯤은 허락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니 “그냥”처럼 세상 제일 싱거운 말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날을 만들어 보고 싶다. 때로는 내가 먼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무작정 가방 하나에 간식을 챙겨 친구 집 앞을 가던 어린 날처럼. 보고 싶다는 말이 쑥스러워 부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무심하게 목 놓아 이름을 외치던 그 날처럼. 목적 없는 그리움으로 무성해진 사람의 숲에서는, 비정한 삶의 폭풍도 견딜 수 있으니. 사람에게만은 목적을 묻지 않겠다. 그러니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나의 문을 두드리길.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