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치즈버거 Jun 01. 2021

9번의 일 - 김혜진

우리도 언젠가 9번이 된다






사진 출처 - 시사IN



 일찍이 ‘필경사 바틀비’는 자신의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회사와 대립했다. 자본주의가 가속화되고 인간이 기계부품처럼 취급되던 1800년대 후반을 비꼰 이 소설 속 인물은 2019년의 끝자락, 한국에서 다시 환생했다. 이름 대신 ‘9번’을 달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대신, 자신의 해고하려는 회사에 끊임없이 ‘임무’를 요구하면서.


 본 소설 속 주인공은 26년이라는 시간을 통신회사에서 수리와 보수를 맡아 일한 현장팀 직원이었다. 현장직 베테랑임에도 회사는 그를 전문가로 대우하기는커녕, 골치 아픈 ‘직원 1’의 배역을 덧씌운다. 회사를 대표해 그에게 뜻을 전달하는 상사들은 대게 부드러운 말투를 써 이면의 위선을 숨긴다. 저성과 대상자로 분류되어 배움은 없고 수모만 가득한 교육을 들어야 하지만 주인공은 ‘명예로운 퇴직’ 대신 ‘처연하게 버티기’를 선택하고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버티는 삶에 보내는 환호는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고 노후를 위해 새로 산 건물은 말썽만 많아 그의 속을 곪게 만든다.


 현장직 베테랑에서 영업직으로, 영업직에서 다시 업무지원단으로 업무지원단에서 다시 시설팀으로.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하던 그는 어느덧 발길에 채는 돌멩이처럼 이곳저곳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버티기는 회사의 밀어내기와 비례한다. 최종적으로 도달한 팀에서 그는 본래 자신이 맡던 수리 및 설치 업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실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전의 일상이 아닌 수형번호 같은 ‘9번’과 토박이들의 저주 그리고 무조건적인 상부의 명령뿐이다. 자부심은 넝마가 되고 이름마저 잃은 주인공은 끝내 영혼마저 잃어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고에도 되려 5만 원을 쥐어주며 배달원을 달래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그 어떤 자각도 없이 그저 ‘한다’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그가 업무 변경 과정에서 내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영업팀에서는 어쩌면 자신이 영업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고 업무지원단에서는 나름의 성과를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인 성과는 자기만족으로 그칠 뿐, 애초에 회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그의 작은 희망들은 얼마 가지 못해 늘 제동이 걸린다. 그와 같은 입장에 처한 동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을 방관하거나 그의 떠남을 반기기도 한다. 이미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생계의 벼랑으로 밀려온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였음으로.


 주인공은 퇴직금을 더 달라거나 자신에게 좋은 대우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가 내내 바라는 것은 오직 ‘제대로 된 업무’였다. 자신이 가진 기술과 지혜를 동원하여 헌신할 수 있는 임무, 가족과 주변을 책임질 수 있는 대가가 주어지는 정당한 노동. 20년이 넘는 시간을 한 직종에서만 보낸 그에게 현장직 일은 그의 삶이자 자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요구하던 ‘일’의 진짜 의미는 ‘자신의 쓸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미련스럽게 ‘일’을 달라고 요구하고, 불합리한 업무 변경을 수긍하고, 삭감되는 월급에도 분노 한 번 표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별다른 일탈이나 욕심 없이 착실하고 안정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온 중년의 남자에게 평생 전념한 일에서 한 순간 배제되는 것은 어쩌면 ‘존재의 박탈’이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모두 들어 본 적 있지 않은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성실함의 미덕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이름 대신 9번을 얻고 나서야 그 미덕이 얼마나 허무한 말에 그치는지 알게 되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스템에 의해 착취당하고 배반당하는 인류의 삶을 이전에도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본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웃이라는 점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왔다. 문제적 캐릭터와는 동떨어진 그의 보편성은 어쩌면 9번의 일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는 담대한 포부로 노동 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분노에 사로잡혀 회사의 부조리를 폭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회사를 험담하는 동료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기세 좋은 혁명가보다는 무감한 소시민에 가까웠고 사람 좋아 가끔은 손해도 볼 줄 알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스템에 대항하지 않았다. 되레 읽는 동안 반감이 들 정도로 사측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유일한 저항이라면 끝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요구하고 맡은 바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교묘하게 노동법상 반칙을 비껴가며 주인공을 밀어내는 회사는, 주인공의 삶에 소소한 기쁨조차 허락하지 않고 불쑥 시스템의 맨얼굴을 내밀어 그를 겁박한다. 규정, 명령, 사칙. 이 모든 것이 매서운 칼날이 되어 주인공의 존엄성을 조각낸다. 깎이고 깎인 주인공은 작은 구(球)가 되어 정처 없이 구르다 종국에는 첨예한 모서리를 가진 괴물로 변모하고 만다.


 소설 속에는 선도 악도 없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충분히 악의 편이라 보이는 윗사람들도 결국은 그보다 더 윗선 그리고 그 명령의 핵심이 되는 ‘회사’의 지시를 읊는 전달자일 뿐이다. 철탑을 두고 마을 주민과 대치하지만 사실상 핵심적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철탑만을 증오의 상징으로 삼아 분노를 표출할 뿐 그들의 의견은 하청업체의 노동자인 9번 앞에서도 미끄러진다. 정작 책임질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고 사고가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9번 뒤로 숨는다. 투명 인간처럼 살던 그가 처음으로 받게 된 여론의 주목이었다. 아이러니한 상황들의 연속은 주제를 살리기 명확했고 늘 나의 등골을 차갑게 쓸어내려갔다.


 심장에 미각이 달린 듯 가슴께서 내내 쓴맛이 느껴졌다. 이 아이러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결기처럼 느껴지던 주인공의 ‘버팀’도 종국에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쥐어짠 안간힘이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사택의 직원들도 그를 무서워하기 시작한다. 여러 번 겪어 온 상황에 그는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는다. 다친 강아지를 치료해 줄 정도의 인정이 살아있는 그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에게는 회사가 지키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이토록 일관되게 ‘일’을 향한 애정을 보이는 주인공을 본 적이 있을까? 본사로 복귀해 본래의 업무로 돌아간다는 희망만이 유일한 구원이 되어준다.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 그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독자인 내가 더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주인공의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소설의 마지막이자 백미를 장식하는 결말 부분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 순간 홀로 캄캄한 산길을 오르며 처음으로 후회의 자책을 한다. 그가 믿었던 일의 의미와 자부심에 대한 고백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없다. 강한 전기 자극이 맴도는 철탑을 같이 올라가 주는 것은 분신 같은 그의 공구 벨트와 안전모뿐이다. 그가 철탑 꼭대기로 올라 너트를 분리할 때는 나마저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사랑이었구나, 진실로 깊은 사랑이었구나.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랑한 사람만이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방식으로 자신이 쌓아온 철탑을 무너뜨릴 준비를 한다. 무너지는 것에는 그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철탑은 적의의 대상에서 회사의 실체가 된다. 주인공은 그 상징적 실체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파괴를 준비한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평생 해온 ‘일’의 방식으로 말이다.


 소설은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9번을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9번들의 이야기를 마주한다. 뉴스에서, 이웃에서, 9번이 되거나 9번마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절규를 마주한다. 이해하기 위해 오랜 시간 들여다보지만 현실이라는 장벽은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역사를 거슬러도 여전히 진행되는 싸움. <9번의 일>을 읽고 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숫자와 전문 용어, 각자의 입장 뒤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일’이 모든 것이 된 사람들에게 ‘일’을 빌미로 존엄을 파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느 날 밤, 비로소 각성한 세상의 9번들이 너트를 풀면 이 세상은 정말이지 철탑처럼 와르르 무너질지 모른다고. 나는 눈을 감고 철탑에서 떨어진 너트 하나를 들어 만지작거린다. 아직 너트에서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름으로 어루만지는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