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어루만지는 존재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을 읽고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본격적인 관계 맺음에 앞서 통성명을 나눈다. 일종의 사회적 규칙이다. 상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의 내부로 들어가기 전 맨 처음 만나는 관문과 같다.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상대의 이름을 자주 부르며 또한 상대방 이름이 가진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똑같은 이름이라 해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따라서도 의미는 확연히 변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관계란 이름에서 시작해 이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이름 불러 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렇듯 존재의 개별성을 무엇보다 잘 구분해주는 이름이라는 것이 소설 속 주인공 ‘나나’에게는 오래된 숙제처럼 여겨진다. 나나, 그녀는 한국계 프랑스인으로 입양아다. 그녀는 나나이기 이전에 ‘문주’였다. 소설은 ‘문주’라는 이름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뱃속에 들어선 새로운 생명, ‘우주’와 함께 말이다. 그녀의 한국행은 열의 넘치는 독립영화감독 서영의 설득도 한몫했겠지만, 결국 나나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한 일 같았다.
‘문주’. 그녀는 좋은 양부모를 만나 나나라는 이름으로 살며 프랑스에서 터를 잡고 직업적 성취도 이루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문주’를 놓지 못한다. 심장 속에 문신처럼 남아버린 옛 이름을 홀로 부르며 아무도 모르게 위안을 얻기도 한다. 문주라는 이름이 이토록 강렬하게 그녀를 지배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 생이 가진 기억의 첫 시작점의 신호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버림과 구원’이라는 상반된 두 사건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아이러니를 가진 이름이라 해도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문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구절에서는 흡사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로 추위를 달래 듯 간절한 심정으로 기억의 불을 환히 밝히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애틋하지만 어딘가 처연하다.
한국으로 온 그녀는 영화감독인 서영의 자취집이 있는 이태원에 묵는다. ‘이름’이 소설 속 핵심 키워드인 만큼 그녀는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이태원을 기점으로 동네의 지명이 가진 뜻을 자주 물어온다. 그녀가 물음을 건넴으로써 서영과 그 무리들은 비로소 동네가 가진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태원, 연희, 녹사평, 합정, 애오개를 함께 넘어오다 보면, 이름을 묻고 그 유래와 사연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이름 가진 존재의 역사를 배우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의 지명도 그러한데 사람이 사람을 알아감에 앞서 이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과 함께. 무심하게 발 내딛고 익숙하게 부르던 그 이름 밑에 깔린 아픔과 눈물들을 알자 함부로 짓밟을 수 없는 존엄이 동네마다 자리하기 시작했다. 대상으로서만 인식된 사물 혹은 장소가 생명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나는 그토록 이름을 물었나 보다. 누구보다 이름의 의미를 ‘알기에’. 버림받았다는 가혹한 기억에 갇힌, ‘문주’라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존엄을 찾아 주고 싶은 그녀이기에.
이야기는 나나가 ‘복희 식당’을 찾아 식당의 주인과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변모한다. 단순히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의 확장이나 전개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기원을 찾아 헤매던 그녀가 점점 존재의 이름을 ‘부르거나 명명하는’ 위치로 자기 역할을 바꾼다는 것이다. 잊힌 이름을 가진 입양아에서 이제는 잊힌 이름을 발굴하는 존재가 되어 타인의 역사를 함께 한다. 복희 식당을 중심으로 또 다른 입양아의 사연과 그에 얽힌 세 여인의 이름 그리고 그녀들이 겪었을 곡진한 삶을 뒤돌아보는 후반부에서는 나나가 마치 이름의 고고학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은 그것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명을 가진다. 변방에서 더 변방으로 밀려나 누구도 묻지 않고 알지 못하는 밑바닥의 사연을 끄집어내는 나나. 그 과정 속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품었던 자기 안의 연민이나 오해와도 서서히 작별을 하게 된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버려짐에 대한 원망이 천천히 그녀가 받은 호의와 친절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이 왜곡한 기억을 인연이라는 따스한 이름들로 다림질 하자, 비로소 자신이 받았던 사랑, 이를 테면 할머니의 수수부꾸미와 눈물 그리고 양어머니의 무심함 뒤에 가려진 나나를 향한 애정이 보이게 된 것이다.
단순한 진심은 제목처럼 단순한 플롯과 구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큰 주제를 끌어안고 있다. 죽음이 있기에 탄생은 신비롭고 태어남이 있기에 사라짐이 처연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이름지은 사람과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 모든 것은 선처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생의 궤적처럼 문주 또한 이 길을 천천히 걷는다. 버려짐을 통해 구원을 배웠던 서글픈 문주는 이제 훌쩍 커 ‘문경’이라는 이름의, 어쩌면 자신의 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와 조우해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 ‘문주’라는 이름에 깃든 이야기가, 문경의 친절이 섞인 거짓말인지 정말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억한 그녀의 명석한 회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문주’라는 아이가 그들에게 아주 소중한 인연이었으며 오래도록 기억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나가 ‘문주’라는 과거 이름의 행적을 밝히며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만 보자면 그녀의 목표는 실패다. 그러나 이름이 그 고유한 명칭이 되기 위해서는 명명하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문주를 찾기 위한 여정이 완벽하지는 않으나 성공했다고 믿는다. 복희 식당의 추연희 여사의 이름과 우리가 잊고 있던 기지촌 여성들, 그리고 미혼모와 입양아, 이방인 등 소수자들의 존재를 조용히 밝히며 문주 자신이 잊혀가는 것을 다시금 명명하여 영혼을 불어넣어 줬으니 말이다. 마치 그녀가 받은 단순한 진심들처럼, 그녀 또한 자신이 받은 사랑을 그렇게 되돌려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나서 ‘단순하다’의 뜻을 사전으로 찾아보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복잡하지 않고 간단함을 일컫는 동시에 교활함 없이 숫됨을 일컫는 동사이기도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을 표현함에 걸맞은 표현이라 이보다 적당한 제목을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를 잃고 철길 위에 방황하던 어린아이를 거둬 ‘문주’라는 이름을 지어 준 기관사의 마음도, 결혼을 앞둔 아들이 알지도 못하는 객식구를 데려와 눈치를 주면서도 사실은 측은지심을 숨기지 못한 박수자 할머니의 마음도, 잠시 스쳐가는 아이들이지만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의미 있는 이름을 지어주고파 자신의 성을 붙인 원장 수녀의 마음도, 이태원으로 다시 돌아온 간호사 추연희의 마음도,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임에도 추연희라는 이름을 찾아주고 그 죽음을 기억하는 주인공의 마음도, 결국은 거창한 이득이나 목적을 위함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과 공감 그리고 연대에서 비롯된 일들이었다. 그것이 찰나이든 아니면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든 그 단순한 진심들이 모여 한 인간을 버티게 하고 살게 하고 기억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여 사소하게 치부되는 친절과 사랑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우주를 품을 만큼 거대한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금 새길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여정에 감사한 마음이 든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상상 속에서 어린 문주를 만나 격려를 보낸 뒤 어른이 된 나나의 등을 토닥이고 싶다. 나도 그녀의 삶을 버티게 한 단순한 진심의 일원이 되고 싶다. 나는 부디 그녀가 평화 속에 영원하길 바란다. 이제 그녀의 한 세상이 될 우주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받은 무해하며 순수한 친절들을 배워 소설 밖에 존재할 모든 문주들을 위해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내보일 수 있는 ‘단순한 진심’ 일 것이다. 예기치 못한 질병과 스산한 겨울에 몸이 움츠려도 한동안 나는 이 소설로 인해 따스한 겨울을 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단순하지만 잊기 쉬운 마음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붙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