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에 수록되어 있다.
아들의 이름은 스코티였다. 스코티는 자신의 생일날 아침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평탄한 삶에도 위기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이들 부부에게 아들의 죽음이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절망이었다.
한편 아들의 생일을 위해 예약했던 케이크 때문에 제빵사는 본의 아니게 절망한 이 부부를 괴롭히고 만다. 당신 아이의 케이크를 찾아가라고 몇 번이나 전화를 건 것이다. 아들이 죽고 나서 부부는 (분노에 가득 차) 빵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제빵사를 향해 울부짖는다. 부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빵사는 지친 두 부부에게 갓 구운 빵을 내놓는다.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를 한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제빵사의 제안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의사의 태도와 대치되면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는다. 의사도 아내에게 무언가 먹기를 권한다. 그러나 아내는 거부하고 의사는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딱 거기까지다. 허기라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마저 잠재우는 슬픔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인 동시에, 의사와 아내를 철저히 타인으로 분리시키는 장면이기도 했다.
카버의 작품에는 뚜렷한 선악이나 편향적 묘사가 거의 없다. 사건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파동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 작품은 평화로운 일상 속 느닷없이 맞이하는 비극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당시 나는 17살이었다.(그 당시 내가 본 이 소설의 제목은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때는 이 소설이 마치 ‘세계는 너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우연한 비극에 이유는 없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는.’하고 냉소하는 듯 보였다. 차가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은 소감은 달랐다. 냉소는 나의 오해였다. 이 소설의 핵심은 나약한 우리 인생을 조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일들에 의해 엄청난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비극 이후의 회복과 평온도 결국은 사소한 배려들을 통해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빵사는 부부에게 자신이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아이를 가져본 적 없는 삶에 대해 담담하게 말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떠올려 보면, 제빵사는 흔쾌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 단지 자기 앞의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일들이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든 내가 어땠건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거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제빵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제빵사는 스코티의 상태를 몰랐을 뿐 아니라 아들의 죽음에 어떤 책임도 없다. 부부가 무턱대고 빵집으로 와 울음을 토했을 때도 그는 그들을 위로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갓 구운 빵을 준다. 이는 부부 중 아내인 앤이 슬픔으로 인해 허기마저 잊은 것과 대칭적 맥락에 있는데, 제빵사는 기본적인 욕구 중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수면욕을 포기하며 그들을 위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사가 얼핏 내보인 형식적 친절과는 달랐다. 하루 16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제빵사가 동이 트도록 그들과 마주 앉아 자신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일부분을 뚝 떼어준 것과 같다. 짐작컨데, 제빵사 또한 슬픔과 상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견디기 위해 무던하게 빵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르면 몰랐지 알면 지나칠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그것이 나를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 없게 만드는 상실이라면 말이다.
나는 제빵사의 고백에서 카버를 떠올렸다. 카버에게도 진저리 나는 삶의 시기가 있었다. 그때 그는 가정불화와 경제적 궁핍은 물론 알코올 중독으로 하루하루를 ‘뇌사상태’ 환자처럼 보냈다고 한다. 비참한 시기를 딛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소설을 쓰게 되고 그것으로 밥벌이하게 되며, 그는 다시는 술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소설은 절실한 것이었다. 카버는 삶의 한 시기를 극복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제빵사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인생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말이다. 카버는 끈질기게 미국 소시민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불행에 호들갑 떨거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행동을 함부로 평가하지도 않았다. 카버가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슬픔을 직접 처리해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죽을 때까지 세컨드 라이프를 유지하며 절실하게 글을 쓰고 인간에 대한 통찰을 멈추지 않았다. 제빵사가 빵을 건네듯, 카버도 소설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내가 처음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접했을 때만 해도 그는 그렇게 주목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의 걸출한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예로 대성당을 번역한 김연수 작가) 카버의 작품은 애독가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특히 이 작품은 이미 꽤 유명한 매체에서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왔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더 읽혀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상실과 상처는 그 정도가 다를 뿐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숙명과 같고 그러한 비극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위에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슬픔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시간이 촉박해서일 수도 있고 무서워서 일수도 있고 애초에 그러한 방법을 잘 몰라서 일수도 있다. 자신의 슬픔조차 마주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타인을 위로할 수 없는 세상에선 자신 또한 위로받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연습해야 한다.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인내를, 슬픔을 대하는 태도를. 그리고 소설은 그것을 훌륭하게 완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바로 이 작품처럼.
책장을 덮는다. 머릿속에 둥근 탁자를 떠올린다. 부부와 제빵사 사이에 나도 가만히 앉아 갓 구운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그리고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을 그들을 생각하며, 베어 문 빵이 그들의 슬픔인 듯 천천히 삼켜본다.
*본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면 손보미의 '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빵가게 재습격',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를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