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치즈버거 Aug 26. 2019

때때로 죽음이 삶을 위로한다

- <데이트리퍼 : 디럭스 에디션> 읽기

브라질의 쌍둥이 작가 '파비오 문'과 '가브리엘 바'의 그래픽 노블


미국의 천재적인 그래픽 노블 작가인 크레이그 톰슨이 서문을 씀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문학가인 아버지의 작가 경력 40주년을 축하하는 날이다. '문학계 거장'의 아들인, 브라스는 신문사에서 부고 쓰는 일을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작가의 꿈을 꿔왔고 여전히 아버지가 선물한 타자기로 글을 쓰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브라스는 남의 인생을 정리하는 한 토막의 부고를 쓰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한다. 누구보다 삶에 대해 쓰고 싶었던 브라스, 친구인 조르지가 그의 어깨를 툭치며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건 잘 알잖아, 친구."라고 말한다. 브라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이 되어 그는 말끔한 슈트를 입은 채 아버지의 축하연이 열리는 웅장한 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담배를 사기 위해 어느 바(bar)로 들어간다. 내친김에 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곧이어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죽는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이었고 자신의 생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대표할 작품의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야기는 연속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분절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브라스에게) 죽음이 찾아오며 하나의 챕터 끝나지만 바로 다음 챕터에서 또 다른 그의 삶이 펼쳐진다. 운 좋게 죽음을 피하고 연장한 그의 중년의 삶 혹은 미처 막지 못한 죽음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끝나버리고 마는 삶 같은 것 말이다. 어찌 보면 죽음의 변주곡이라 할 만큼 여러 형태의 죽음이 챕터마다 등장하고 또 그 죽음만큼이나 다른 브라스의 삶이 존재한다. 그는 21살에 죽기도 하고 11살에 죽기도 하고 모든 성공을 거둔 노년에 아내와 애틋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을 미루거나 앞당기는 변수는 우연 혹은 자신 그리고 타인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깊은 감정과 사연들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인 쌍둥이 형제들이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니체를 떠올렸다. (사랑해 마지않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있다.


  이것이 니체의 그 유명한, 영원히 동일 반복되며 차이와 다양성을 만드는 순환적 시간인 영원회귀. 시작과 끝 다음에 소멸만이 남아있는 직선적 시간관과 달리, 순환적 시간에서는 시작이 끝이며 끝이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작점과 끝은 부드럽게 맞닿아 원을 만들고 그 원은 끊임없이 존재의 바퀴가 되어 굴러간다. 니체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삶 또한 무수히 반복된다. 설령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그것은 순간의 착각일 뿐 그러한 반복은 멈추지 않는다. 니체는 이러한 영회귀를 받아들이고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적극 권장했다. 절망도 희망도 없이 온몸으로 벽을 부수며 묵묵히 나아가는 삶. 그것이 초인이라고.


  우리는 사는 동안 초인은커녕, 인간답게 사는 일에서조차 실패를 맛볼 수 있다. 인간답게 사는 일은커녕,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해는커녕 나 자신을 다 알지도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내 앞에 바짝 코를 갖다 대는 순간조차 죽음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이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러한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끝'을 전제하고 있다. '어디서부터'를 삶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나의 첫 기억인 만 5세부터를 나의 삶의 시작으로 이라고 보아야 할지 엄마가 나를 가진 봄의 어느 날을 삶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러나 죽음만큼 명확하다. 아직 나에겐 당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죽음은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 형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럼 나는 그 순간에 안녕, 하고 초연히 손을 흔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내 부고는 그저 내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다. 특히 내 딸, 내 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 인생의 성공을 가늠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건, 내가 진정으로 정의되는 순간은 죽음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사람마다 죽음을 떠올리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이란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손님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죽음을 떠올리는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동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죽음이 삶을 위로한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한 번 더 힘을 내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로 죽음이라는 극단적 끝을 '위안 삼아' 극단적으로 하루를 더 버티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이상하게 살아진다. 물론 그 삶의 주체가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에게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가듯 삶이라는 강력한 힘의 아귀에 목구멍이 조여 헐떡이는 것 같지만, 인간사란 참 얄궂게도 흘러가서 생각지도 않은 변수들에 의해 위기를 역전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럴 땐 이 책을 펼쳐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 보아도 삶이 있다는 점이니까. 죽음이 없는 삶은 거짓이며 삶이 없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제목인 '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라는 뜻이다. 비틀즈도 1965년 겨울 동명의 노래를 발표했었다.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여인도 하루치기 여행자인데 편도행 기차표를 들고 왔다. 그녀는 뭇 남성의 마음을 애태우지만 하룻밤 사이 떠나버렸다. 노래 가사가 이 책의 내용을 연상시키는데 멜로디는 굉장히 롹킹하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는 이 노래가 마약에 대한 것이라고 말함.......)

매거진의 이전글 기다림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